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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의 시대 ‘무해함’의 미학을 만나다지금 이곳에선 2026. 5. 29. 19:30
자극의 시대 ‘무해함’의 미학을 만나다
■ 김상유 탄생 100주년 ‘쉽게 닳지 않는 사람’展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서 150여 작품 공개
동판화서 시작, 목판화, 유화까지 시대별 전시
RM 구입으로 유명한 ‘대산루’ 연작 2점도 나와
최수문 선임기자
입력2026-05-28 17:43
수정2026-05-28 23:52
지면 27면

김상유의 ‘대산루’, 1990년, 개인 소장. 연작 중에 하나를 BTS RM이 구입했다고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탔다. 사진 제공=서울미술관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긴 평온한 얼굴의 한 사람이 있다. 뒷배경은 다양하지만 그의 평안을 해치지는 못한다. 달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상의 시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한 존재로 인식된다. 작가는 ‘이 인물은 곧 자신이며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화면 속 인물에게는 시간의 흔적도 엿보인다. 꼿꼿했던 인물은 시간이 흐르며 머리가 조금씩 벗겨지고 신체는 더 단순해진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고(故) 김상유(1926~2002) 회고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이 열리고 있다. 동판화, 목판화, 유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작품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는 전시다. 미술관 측은 “극단적인 것을 찾으려 하는 자극의 시대에 ‘무해함’의 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작가는 어릴 적부터 화가를 꿈꿨지만 6·25 전쟁 와중에 팍팍한 살림살이에서는 가당치 않은 꿈이었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살아가던 그는 마흔을 앞둔 1963년 우연히 접한 미국 잡지의 동판화 특집 기사를 통해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의 꿈을 마주한다. ‘이렇게 끝날 수 없다’는 절박함은 그를 예술의 길로 이끌었다.

김상유 작가의 1960년대 모습. 사진 제공=서울미술관
당시 국내에는 동판화 기계가 없었고 가르쳐 줄 사람 역시 없었다. 그는 버려진 국수 기계를 분해해 자신만의 판화기를 직접 제작했다. 판을 부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초산을 구해 아연판을 부식시키며 독자적인 기법을 연구했다. 특히 아연판을 부식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한 가스는 그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수년간의 실험과 연구는 1970년 제1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의 대상으로 돌아왔다.

김상유의 에칭 동판화, 1975년. 사진 제공=서울미술관
동판 작업으로 녹내장이 생긴 작가는 재료를 목판으로 바꿨고, 이 과정에서 더 단순하고 향토적인 질감을 구축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력 저하와 육체적 고통은 계속됐고 결국 그는 칼을 내려놓고 붓을 들었다. 유화 작업에서 그는 캔버스에 색을 채운 뒤 천으로 닦아내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했는데, 덕분에 유화지만 동양적인 수채화의 질감을 구현했다. 1990년 제2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김상유의 목판화, 1970년대. 사진 제공=서울미술관
그의 유화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단순한 색과 면, 그리고 절제된 선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명상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화면 속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인물은 기본적으로 작가 자신이다. 흥미롭게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림 속 인물도 함께 늙어간다. 작가는 나이 드는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화폭에 옮겼다. 이는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이 곧 명상이었던 그의 철학을 대변한다는 것이 미술관측 설명이다.

김상유의 ‘청산록수’, 1999년, 개인 소장. 사진 제공=서울미술관
작가는 작업에 매달릴수록 주류 미술계와 거리를 뒀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게 덜 알려진 이유다. 대신 한국의 고건축과 기물을 찾아 지방 곳곳을 다녔다. 유서 깊은 땅을 지나며 고택과 정자, 오래된 풍경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그림으로 되살렸다. ‘대산루’ 연작이 그 중 하나다. 2022년 방탄소년단(BTS)의 리어 RM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산루’ 연작 중 하나를 구입했다고 밝히면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석파정 서울미술관 1층 전체인 800평 규모 공간에서 그의 150여 점을 선보인다. 1960년대 초기 동판화부터 전국의 고택과 정자를 찾아다니며 한국적 아름다움을 탐구한 판각, 1980년대 이후 ‘무위자연’을 구현한 유화까지 연대기별로 짚어준다.
작품과 함께 작가의 예술 도구, 유품, 전시 도록, 생전 신문 기사 등이 소개된다. 동판화와 목판화의 제작 과정도 함께 전시돼 관람객에게 교육적 체험을 제공한다. RM의 소장품으로 유명해진 ‘대산루’ 시리즈 중 2점도 나와 있다. 미술관 측은 “RM은 전시 개막 직후 목발을 짚고 방문해 꼼꼼하게 작품을 관람하고 갔다”고 전했다.
이러한 대규모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서울미술관 설립자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의 뜨거운 미술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 회장은 2002년 1월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김상유 개인전을 보고 반해 당시 전시에 나왔던 작품을 거의 모두 사들였다고 한다. 해당 전시는 작가의 생전 마지막 개인전으로, 작가는 같은 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전시 출품작 150여 점 중 100여 점이 안 회장의 소장품이다. 전시는 8월 17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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