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예술가 비크로프트 내한 퍼포먼스
세계적인 행위 예술가 바네사 비크로프트(37· Beecroft)가 26일 서울 신세계 백화점 본점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이 백화점 4층과 5층을 잇는 넓은 계단에 붉은색과 살색 옷을 입은 여자 모델 31명을 둥글게 세운 뒤 6시간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게 하는 퍼포먼스다. 무위(無爲)와 피로에 지친 모델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듯 주저앉는 과정을 비크로프트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었다. 이번 작업의 제목은 ‘VB60’.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60번째 작품’이라는 뜻이다.
비크로프트는 69년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태어나 뉴욕에 사는 작가다. “당대의 행위 예술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가졌다”고 미술평론가 임근준(36)씨는 말했다. 평단 안팎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켜왔고, 동시에 부자 컬렉터들에게 인기있다는 얘기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시종 골격이 똑같다. 모델 수십~100명을 관객 앞에 장시간 우두커니 세워놓고 자세와 대오가 서서히 흐트러지게 만든다. 딱 두 차례 미국 해군 남자병사들을 쓴 걸 빼면, 전부 여자 모델을 썼다. 서울에선 옷 입은 모델을 썼지만, 베를린·LA·제노아 등에선 모델을 홀딱 벗겼다.
논쟁이 불거져 나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유럽과 미국 평론가들은 “나체의 미녀들이 흐트러지는 과정을 통해, 여체를 성적 욕망의 대상에서 ‘몸’ 그 자체로 승화시킨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진영과 “지식인용 고급 포르노에 불과하다”는 진영으로 갈려 싸우고 있다. 작가 본인은 옵서버지(신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기 작품은 “수치·자기혐오·불안 등 내 마음 속에 추한 정경을 투영한 자화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비크로프트는 영국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양친이 결별한 뒤 줄곧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들로 꽉 찬 이탈리아의 소도시에서 ‘무신론자·급진좌파·싱글맘(single mom)’인 비크로프트의 어머니는 거의 외국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비크로프트는 살찔까봐 두려워서 14세 때부터 10년간 자기가 먹은 모든 음식을 일기장에 강박증 환자처럼 기록했다.
93년 밀라노에서 선보인 첫 퍼포먼스 ‘VB1’은 일종의 고백이었다. 그녀는 화랑 복판에 일기장을 놓고, 미대 동창 30명에게 자기 옷을 입혀서 일기장 주위를 느릿느릿 돌게 했다. 초기 작업을 찍은 사진으로 그녀는 세계적인 화상(畵商) 제프리 디치 눈에 띄어 뉴욕에 입성했고, 29세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8일~다음달 25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바네사 비크로프트’ 회고전은 유럽 평론가들의 논쟁에 우리 미술팬들도 한번 끼어들어볼 좋은 기회다. 과거의 퍼포먼스를 찍은 사진 40여 점이 걸린다. 과연 페미니즘일까, 포르노일까? (02)720-1020
▲ 26일 오전 신세계백화점 본점 3층 계단에서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지휘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31명의 붉은색과 살색옷을 입은 모델들은 온종일 서서 점차 망가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조선일보 주완중기자
[김수혜기자 goodluc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