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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마주쳤는데 못 구해"… 가슴 속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지금 이곳에선 2025. 7. 14. 09:28

    경북 산불, 초토의 사람들

    "눈 마주쳤는데 못 구해"… 가슴 속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이유진기자입력2025.07.14 04:301면

    [산불 이후, 초토의 사람들]
    <1> 지옥불에 빠지다 : 김미경 스토리
    대피 차량 불 붙어 눈 앞서 폭발 노인 3명 숨져
    "더 못 구했다" 자책, 환청·불면 '트라우마'로
    목숨 건졌지만, 불은 집·건강·직장 모두 앗아가
    이재민 숙소 생활 "불 꺼진 이후가 더 힘들어"

     

    경북 산불 당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김미경씨가 알약을 한 움큼 쥐고 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김미경(66)은 침대 한쪽에 쪼그려 앉아 알약을 세기 시작했다.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약을 손바닥에 쏟아 알알이 만지며 개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열여섯, 열일곱. 심장내과, 척추외과, 신경정신과. 열차처럼 칸칸이 이어진 약포지가 방바닥에서 바스락댔다.

    미경은 흰 알약 더미 속에서 새끼손톱보다 작은, 둥글고 푸른 약을 찾아내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트리아졸람. 복용하면 10시간 정도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다. 생수 뚜껑을 따려고 했지만 땀이 배어 나온 손이 자꾸 헛돌았다. 약은 한 번에 삼켜지지 않았다. 세 번에 나눠 먹어야 했다. 500mL 생수 한 통이 순식간에 비었다.

    20분 남짓 지나자 약 기운이 돌며 몸은 물에 적신 수건처럼 축 늘어졌다.

    “망할 년, 혼자만 살아서…”

    한 달 전부터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을 피해 미경은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도망쳤다.

    바람과 함께 오다

    3월 25일, 경북 영덕군 변두리의 작은 실버타운. 비품창고에서 성인용 기저귀를 챙기던 미경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요양보호사인 그는 퇴근 후 남편과 저녁을 먹으러 가다가 대피해야 할 수도 있으니 돌아와 짐을 같이 싸달라는 실버타운 원장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빈속으로 복귀한 참이었다. 이곳 근무 4년째지만 퇴근했거나 휴무인 직원까지 전부 불러들인 건 처음이었다.

    “쌤,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꼬르륵 소리를 들었는지 옆에서 담요를 개던 동료가 말했다. 미경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실버타운은 여유로웠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당직 보호사 둘만 남기고 텅 비던 곳이 북적대자 한 노인은 “소풍 가는 거냐”고 했다. 원장 전화를 받고 잔뜩 굳은 채 돌아온 직원들의 표정에서도 잠시 그늘이 걷혔다.

    앞마당엔 직원들이 끌고 온 승용차 6대의 트렁크가 활짝 열린 채 주차돼 있었다. 기저귀를 실으러 나온 미경은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3월에 뭔 바람이 이렇게 쌩쌩 불어?”

    비슷한 시각 실버타운 원장 남지승(58)은 노인들이 머무는 생활동에서 바로 옆 사무실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생활동에서 챙길 비품과 담당을 지정하고, 정리된 물건들이 어떤 차량에 실릴지 살핀 직후였다. 이곳의 노인은 21명. 대부분이 치매를 앓고 있고 다리를 쓰지 못한다. 대피하려면 기저귀부터 소변줄까지 챙길 게 산더미였다. 야간 당직 보호사 두 명으론 어림도 없다고 생각해 복귀 가능한 전 직원에게 소집령을 내렸던 이유다.

    ‘주변이 왜 이렇게 환하지?’ 몇 분 전과는 딴판이었다. 차량 전조등이 켜졌나 싶어 창문에 눈을 대고 사무실 밖을 살폈으나 뒤뜰은 비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밤 8시 4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동이 트듯 산 너머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3월 25일 밤 강풍을 타고 경북 청송에서 옮겨 붙은 대형 산불이 산을 넘어 영덕읍으로 번지고 있다. 독자 제공

    몇 초 뒤 지승의 눈에 집채만한 시뻘건 불덩이가 실버타운 뒷산 봉우리를 넘는 모습이 들어왔다. 가느다란 막대 모양의 불덩이 수십 개가 나무 둥치에 바바바박 박혔다. 중국 무협 영화나 사극에서나 보던 불화살 같았다. 온몸으로 불화살을 받아낸 나무에선 휘발유를 끼얹은 것처럼 불길이 솟아올랐다. 지승은 사무실을 뛰쳐나와 생활동 문을 열어젖혔다. 원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오자 짐을 싸던 직원들의 잡담 소리가 뚝 끊겼다.

    경북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이 순식간에 영덕까지 집어삼킨 건 바람 때문이라는 걸 지승은 며칠 뒤에야 알았다. 3월 27일 경북 대형 산불의 확산 속도가 역대 최고로 빠른 시간당 8.2km에 달한다는 국가산림위성정보활용센터 발표가 있었다. 시간당 8.2㎞는 사람이 뛰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그곳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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