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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과 이창동은 이렇게 달랐다시사 경제 2008. 3. 23. 00:25
사람을 떠올리다
▲ 이명박정권의 초대 문화부장관 유인촌. ⓒ 유성호 이명박 정권의 초대 문화부장관 유인촌(57)의 행보가 "문화부장관답지 못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다.인터넷에선 "<전원일기> 김 회장집 둘째아들이 완장 차더니 변했다"는 조소가 넘쳐나고, 문화단체들 역시 유 장관의 태도가 전횡과 독선에 가깝다며 힐난한다. 여기에 더해 이명박정권의 부적절한 장관 인사에 입다물던 보수언론들조차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관이 반복적이고 노골적으로 (산하단체 기관장의) 사퇴를 압박하는 것은 문제다"라는 사설을 쓰고 있다.
문제는 '100억 원이 넘는 재산형성 문제' 등으로 청문회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유 장관의 '말'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좌파정권(노무현정권)에서 문화부 산하단체장으로 임명된 이들을 향해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계속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행위"라고 압박하더니, "끝까지 자리에 연연한다면 재임 기간에 어떤 문제를 야기했는지 공개할 수밖에 없다"고 사실상 '협박'까지 서슴지 않은 것.
유 장관이 마구잡이로 쏟아놓은 이러한 말이 자신의 개인적 견해인지, 그를 장관으로 임명한 이명박 정권의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기관장의 임기보장)'까지 부정하며 자신의 선배에 다름 아닌 타 장르 예술가들의 사퇴를 종용하는 유인촌의 태도는 '문화부장관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네티즌·문화단체·보수언론 모두에게 공격받는 유인촌
상황이 이런 양상으로 흘러가자 인터넷에선 노무현정권의 초대 문화부장관이었던 이창동(54)과 유인촌 장관을 비교하는 댓글과 네티즌 의견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그 핵심은 "스타일과 어법은 물론, 두 사람이 목표에 다가가는 방법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3년 3월. '문화관광부 홍보업무 운영 방안'을 마련해 발표한 이창동 장관은 환호와 힐난을 동시에 받았다.
관행처럼 지속돼온 정부의 '모시는' 대언론정책을 완전히 뒤집어 '당당한 홍보'를 선언한 이 장관의 결정에 기자들의 전횡을 마뜩찮아 했던 사람들과 군소 언론매체들은 박수를 보냈지만, 기득권을 행사하던 대형·보수언론들은 "이창동은 노무현의 홍위병"이라는 요지의 평가절하성 기사를 연일 토해냈다.
시끌벅적한 논란을 일으킨 것은 이창동의 정책만이 아니었다. 장관에게 '당연지사' 주어지는 관용차와 운전기사를 마다하고 자신의 승용차를 스스로 운전해 출퇴근하는 '독특한' 스타일과 어두운 색깔의 딱딱한 정장을 벗어 던진 자유분방한 옷차림 역시 세간의 설왕설래를 불렀다.
이창동의 특징엔 나지막한 목소리 톤과, 직설적이건 우회적이건 자기 견해를 강변하지 않는 태도도 포함됐다. 그리고, 이창동은 1년 4개월 남짓 짧은 시간을 정치판에 머물다 본업인 영화로 귀환해 국제영화제 등에서 호평받은 <밀양>을 연출했다.
문화부장관 재직 당시 이창동은 아래와 같은 글을 부(部) 직원들에게 남겼다.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이 글은 시간을 소급해 유인촌 장관식 '강제와 압박'으론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음을 예술가답게 충고하고 있다.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소통'이란 그 사회의 성격과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과거에는 사회가 신분이나 집단으로 구성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의사소통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민주화되었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의 방식이 민주화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정치적 제도는 민주화되었으면서도 그 소통의 방식은 전혀 민주화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와 정당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의 사회적 기능을 맡은 공적조직은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눌려 마비되고 왜곡되어 기형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창동, "당당한 홍보" 외치고 관용차 거부해 호평
지난 화요일(18일). 유인촌 장관으로부터 사퇴하라는 압력을 반복해 받고 있는 김정헌 문화예술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위원장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법이 정한 임기동안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할 뿐"이라는 말을 담담히 전해왔다.
민주적으로 열린 의사소통 방식을 거부하고,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눌린' 날선 발언으로 자신의 동료인 예술가들을 곤혹스러움에 빠뜨리고 있는 유인촌 장관. 그는 임기가 끝난 후 너무나 친숙했던 심성 고운 '김회장 집 둘째 아들'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
아래는 문화부장관의 위상과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어떠한 형태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이미 반 세기 전에 있었던 외국의 에피소드지만 오늘날 한국 상황에 대입해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차대전 당시 독일에 저항하며 "자유 프랑스의 깃발을 놓아선 안 된다"고 호소한 샤를르 드골(1890~1970). 대독항쟁이 끝난 후 대통령이 된 그는 스페인내전 때 프랑코 왕당파를 비난하며 총을 든 양심적 지식인이자 <인간 조건>을 쓴 소설가 앙드레 말로(1901~1976)를 문화장관으로 임명한다.
군인 출신임에도 문화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드골. 그가 <좁은 문>과 <전원교향곡>의 작가이자 조국 프랑스에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앙드레 지드(1869~1951)의 추모식에 참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슬픔에 겨워 조사(弔辭)를 읽어 내려가던 드골이 "우리는 앙드레라는 이름을 가진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습니다"라는 대목을 낭독한 후 동석한 말로의 얼굴을 돌아보곤 깜짝 놀랐다. 담배를 피워문 말로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본 드골이 원고에 없던 내용을 즉석에서 추가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 함은 물론, 여기 계신 '앙드레 말로 장관을 제외한 앙드레' 중에서겠지요."
문화를 두려워한 권력, 권력 앞에 의연했던 문화
정치가 사람의 하드웨어를 관장하는 시스템이라면, 문화는 인간의 소프트웨어에 주목한다. 둘 사이의 우열을 말하는 것은 우습지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분명 다른 것.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드골이었지만, 문화를 관장하는 말로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이처럼 한 나라의 문화부장관은 막중하고 두려운 자리다. 10년 가는 권력은 없지만, 인간의 정신적 영역인 문화는 시대와 정권을 뛰어넘는 것. 그것을 알기에 권력(드골)은 문화를 존중했고, 문화(말로)는 권력 앞에 의연했던 것이다.
당대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코드를 강변하는 나팔수가 아닌 예술가임을 잊지 않았던 말로. 그는 드골이 실각한 후 문학으로 돌아와 인류사에 길이 남을 명문을 남겼다. 정치적으로 문화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정치를 실천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2008.03.20 18:35 '시사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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