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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수의 멋, 김진 전 논설위원을 추모하며 [여의도깔깔깔]
    지금 이곳에선 2026. 4. 18. 18:46

    보수의 멋, 김진 전 논설위원을 추모하며 [여의도깔깔깔]

    이석현 정치평론가·전 청와대 행정관 입력 2026.04.18 16:00 호수 2905

     

    김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photo 뉴스1

     

    근래 가장 충격적인 유서였다. 절박해서도 격정적이어서도 아니었다. 이것이 세상을 등지겠다고 결심한 이의 글이 맞나. 이렇게 고요하고 정중할 수 있나. 어떠한 감정적 사족도 없는 간명한 문장이었다.

    개인적인 사정(불안)으로 삶의 동력을 잃었습니다. 스스로 마감하고 미지의 세계로 떠납니다. 저는 평생 언론인과 평론가로 활동했습니다.

    틀린 사실과 잘못된 논리가 혹시 일부 있었다면 사과드립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인간 삶의 본질을 보다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구조 관계자들께 죄송합니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등록했습니다. coma에 빠지면 장기를 기증해 주세요.)

    김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해 찬반이 있을 수 있다. 덮어놓고 미화하고 추켜세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때로 어떤 죽음은 남은 자들을 멈추어 서게 한다. 곱씹고 고민하게 한다. 대표적 보수논객이었던 김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초월적’ 유서가 꼼짝없이 그랬다. 유서를 공개한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물론이고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등 진영을 막론하고 추모의 마음을 밝힌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유서를 여러 번 되읽고 나니 한 글자가 남았다. 멋. 보수의 멋.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좌초된 배가 망망대해 속으로 침몰하기 직전, 모두가 절규하며 생의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분주히 움직일 때 묵묵히 옷 매무새 만지며 마지막을 준비한 노신사도 있었다. 아 그랬지, 우리 사회에도 그런 어른들이 있었지. 보수란 그런 사람들이었지.

     

    잃어버린 보수의 멋을 찾아서

    보수의 멋이란 무엇일까. 겸양과 염치가 밥 먹여주지 않는 시대, 그런 ‘뜨뜻미지근한 것’이 남아있기는 할까. 2026년 대한민국 보수 정치는 그 멋을 지켜내고 있을까.

    보수는 ‘어른스러움’이었다. 치기어린 정의감으로 달큰한 제안을 남발하는 이들을 막아선 것은 언제나 보수였다. 더 많은 복지를 이야기하는 진보에 맞서 책임 있는 통치와 지속가능한 해답을 제시하는 일, 설익은 무책임을 격퇴하는 어른의 모습이 곧 보수의 원형이었다.

    보수는 ‘프런티어’였다. 진보는 늘 현대가 가장 최악의 시대라고 말한다. 가진 자들의 탐욕도 그로 인한 불평등도 온통 역대급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진보가 대결에 매진할 때 보수는 해결에 집중한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나아져왔음을 인정하고, 함께 이뤄온 성취를 재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가자고 손 내미는 것이 보수의 빛나는 미덕이었다.

    보수는 ‘자유’였다. 개인을 통제하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탄압이나 규제를 분연히 격파하는 일이야말로 보수의 사명이었다. 엄혹했던 냉전시대에 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시장의 자유를 외쳤다면, 이제 진보의 문화전쟁 공세에 맞서 사회문화적 자유를 지키는 것이 보수의 새로운 사명이 되어야 할 터였다.

     

    어느새부터 보수는 안 멋져

    대표적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현주소는 어떨까. 모두가 목격하고 있듯 20% 남짓 지지율이 무색하게 계속 오른쪽 끝 극단으로 질주하고 있다. 가열찬 소멸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자해적 비상계엄과의 단절은커녕 보수 고유의 멋을 잃은 지도 오래다.

    진보진영의 복지 공세에 맞서지 않은 지는 더 오래됐다. 진보가 자전거 사은품을 약속하면 보수는 옥장판 세트를 약속하는 식이다. 보수가 ‘더 많은 복지’ 논쟁을 해서 진보를 이겨낼 재간이 있을까. 눈앞의 탐욕에 멀어 자신들의 빛나는 세계관을 내다버린 결과다.

    ‘프런티어’ 정신과 ‘자유’의 가치도 폐기한 지 오래다. 국가 폭력과 검열에 반대해야 할 시간에 정당 내 린치의 주인공이 되어 구성원들을 억압하고 배제했다. 그렇게 이준석, 한동훈 등 자유주의 보수를 지향하던 이들을 신나게 추방시켰다.

    PC주의를 근간으로 한 진보 진영의 문화전쟁에 맞서기는커녕 편승하기만 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문화전쟁 의제는 조악한 논리로 무장한 반중정서밖에 없다. 이길 수 있는 경쟁은 모조리 거부하고 패배가 예정된 전장에만 달려든 셈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의 확장재정에 반대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한 방송에 나가 “보수정당이 규제철폐에 나서야 한다는 말에 반대한다”며 “시장에 맡기면 시장 실패가 있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보수우파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진영의 기본 원칙과 세계관도 체화돼 있지 않은 정치인들이 모여있는 곳, 그저 민주당이 싫은 사람들이 모여 한 시절 관직을 나누어 갖는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 현재 국민의힘의 현주소다.

     

    '이재명'이라는 파도

    덕분에 한국 정치는 상전벽해 정계개편 중이다. 양극화된 현대정치에서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70%에 육박하는 것이 그 증거다. 보수정치의 몰락에 발맞춰 이재명 대통령의 과감한 중도 우클릭이 텅 빈 보수의 공간을 향하고 있다. 보수정당이 합리적 보수의 공간을 활짝 열어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동혁 대표가 방송에 나가 “‘국민의힘은 규제를 푸는 쪽’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말할 때 이재명 대통령은 ‘고용유연화’ 의제를 꺼내들었다. 진보 진영에서 터부시되던 의제를 과감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쯤되면 이재명 대통령과 국민의힘 중 누가 더 보수에 가까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시대착오적 보수정당이 사라지고 진보정당만 남으면 한국 정치가 오롯이 정화될까? 그럴 리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결국 진보정당 출신 대통령이다. 그의 과감한 우클릭 행보도 당내 지지층을 섬세하게 다독이며 하는 외줄타기에 가깝다. 이재명 대 정청래, 소위 ‘명청갈등’이란 말이 언론지상을 뒤덮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결국 보수의 일은 보수가 해야 한다. 무책임에는 책임으로, 결과적 평등에는 기회의 공정으로, 문화적 검열에는 표현의 자유로 응전할 수 있는 유능한 보수가 있어야 한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진부한 말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보수정당의 존재는 진보의 폭주를 제어하는 최소한의 견제와 균형으로서 절대적으로 긴요하다.

     

    남은 자들의 몫

    김 전 논설위원의 새로운 여정을 추모하며 남은 자들의 몫을 생각한다. 보수정당이 처참히 침몰하는 사이 누군가는 ‘뉴이재명’이란 이름 아래 진보 정부의 중도 우클릭을 견인하고자 애쓰고 있고, 또 누군가는 보수정당 내부를 개혁하겠다고 일전을 벌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진영에 서서 누구의 편을 드는지가 아니라 어디에서든 보수의 멋, 그 미덕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보수정당의 패배가 곧 보수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김 전 논설위원의 마지막 인사가 끝내 굴복하지 않고 담담히 떠나겠다는 작별인사처럼 느껴졌던 이유다. 여전히 보수 진영에는 귀한 어른들도 있다. 모두가 진보 진영에 대한 증오에 휩싸여 시대착오적 부정선거론으로 뛰어갈 때에도 무너지는 보수의 폐허 앞에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다.

    온갖 비판을 들어가며 이재명 정부의 중도실용 행보를 격려하는 정규재 전 한국경제 주필이 있는가 하면,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보수의 재구성을 역설하는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도 있다. 쉽게 구부러지지 않는 선배들의 뒷모습은 진영을 막론하고 귀한 표상이 된다.

    그리하여 거듭 김 전 논설위원의 명복을 빈다. 당신께서 말했듯 '인간 삶의 본질을 보다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삶이었기를. 모쪼록 새로운 여정 중에도 논객 김진답게 의연하기를.

    유서에서 ‘잘못된 논리가 있었다면 사과한다’면서도 ‘일부’라는 말을 굳이 추가해 적어 넣는 그 꼿꼿한 자존심도 끝끝내 지켜내시기를.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50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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