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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낙/당신의 일상에 문학을 똑똑!
    문화 광장 2025. 3. 19. 10:32

    당신의 일상에 문학을 똑똑!(knock knock) ✊
    오늘도 신선하게 배달되는 문학 소식, 무낙(Munhak). 매주 월요일 9시에 찾아갑니다.
    어느덧 겨울이 녹아내리는 계절입니다. 아직 조금은 쌀쌀하지만, 길가 곳곳에 벌써 핀 성격 급한 봄꽃도 보이고요. 이런 오묘한 날씨를 만끽하면서 집 근처 산책이라도 해보는 건 어떨까요. 길을 걷다 마음에 드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기도 좋은 날들입니다.
    오늘은 어떤 책을 함께 읽어볼까요. 혹시 sooji2님은 원작이 있는 연극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을 찾아보는 편이신가요. 요새는 웹툰이나 만화의 미디어 믹스 사례도 많아졌지만, 아직까지는 원작이 소설인 경우가 적지 않은데요. 저는 콘텐츠가 마음에 들면 원작 소설을 읽곤 합니다. 원작을 읽으면서 좋은 이야기가 주는 여운에 푹 빠지는 거죠.
    최근 에드워드 애슈턴의 공상과학(SF) 장편소설 📖‘미키7’을 읽은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을 보고 나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바로 원작소설을 샀습니다. 사실 이 책은 무낙 독자(khy*****)님이 지난 무낙 레터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아주시기도 한 터라 더욱 책임감을 갖고 읽었어요. 독자님께 거듭 감사합니다😁
    영화와 소설의 주인공 ‘미키 반스’는 지구를 떠나 우주의 다른 행성을 개척하는 임무에 투입됐다가 이 과정에서 죽으면 거듭 복제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소모품의)’이라는 존재입니다. 말그대로 소모품처럼 쓰이는 인간인데요. 위험한 임무에 로봇아닌 익스펜더블을 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실험용 ‘인간’만큼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표본은 없는 데다 다시 만드는 비용도 로봇보다 덜 들어서죠.

     
    👆영화 '미키17'의 한 장면.
    (여기부터는 영화 미키17과 소설 미키7의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미키와 복제된 미키가 동시에 존재하게 된 상황, 또 개척단이 찾은 행성 ‘니플하임’의 토착 생명체 ‘크리퍼’와의 갈등. 두 작품은 ‘테세우스의 배’라는 큰 줄기를 공유합니다. 영화에서는 이 개념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소설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묻죠. “테세우스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했어요. 그동안 배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뜯어져 배를 고쳐야 했어요. 몇 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원래 선체를 구성했던 목재는 모두 교체되고 없었어요. 이 경우에 테세우스의 배는 출발할 때와 같은 배일까요? 아닐까요?” 이 질문에 “당연히 같은 배”라고 답하는 미키에게 거듭 질문이 주어집니다. “좋아요. 만약 배가 폭풍을 만나 산산조각이 나서 다시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완전히 새로운 배를 지어야 하면요? 그래도 여전히 같은 배인가요?”
    다만 미키17과 미키7은 이런 기본 설정을 제외하고는 꽤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선 미키의 이름에 붙은 숫자는 그가 복제된 횟수를 의미하는데요. 소설에서는 7번 복제됐다면, 영화에선 무려 17번이나 복제됐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영화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인 크리퍼의 꼬리를 자르고 소스를 만드는 사령관의 아내 ‘일파 마샬’은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각국의 문제가 있는 정치인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령관 ‘마샬’도 원작에서는 냉정한 관리자에 가깝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도 딴판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원작'이라기보다는 스핀오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이렇게 원작을 다른 콘텐츠로 옮기면서 내용을 각색하는 건 흔한 일인데요. 한국에서 인기 뮤지컬로 자리 잡은 ‘베르테르’도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답니다.
    소설에서 ‘베르테르’는 ‘로테’와 처음 만나기 전 이미 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습니다. 로테도 첫 만남에서 베르테르에게 “알베르트는 훌륭한 사람으로 저와는 약혼한 사이나 다름없는 분”이라고 자신의 약혼 사실을 언급하죠.
    약혼자의 존재를 알고도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진 소설과 달리 뮤지컬의 베르테르는 이를 한동안 모릅니다.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난 이후에야 약혼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설이 쓰인 1774년과 오늘날의 도덕관이 같지 않아서 원작을 따른다면 관객이 그에게 이입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겠죠. 이처럼 각색은 단순히 재미뿐 아니라 여러 이유로 이뤄집니다.
    👆애니메이션 퇴마록 포스터(왼쪽)와 원작소설 퇴마록 국내편1 표지.
    최근 미키17뿐 아니라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원작이 있는 영화가 있는데요. 바로 이우혁 작가의 판타지 소설 📖‘퇴마록’의 애니메이션입니다. 1998년 개봉했던 동명의 영화에 실망한 분들도 적지 않았던 터라 개봉을 앞두고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습니다. 어떤 콘텐츠의 원작을 먼저 접하는 경우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작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주인공의 모습을 비롯한 여러 장면이 기대만큼 재현되지 않았을 때는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주로 유명하고 팬이 많은 작품을 각색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원작 파괴나 훼손, 더 나아가 모독 논란이 따라붙기도 합니다. 원작을 털끝 하나도 고치지 않기를 바라는 ‘강경 원작파’도 존재합니다. 반면 원작 초월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호펑받는 경우도 있고요. sooji2님은 어떠신가요. 미디어 믹스에서 원작과 각색 중 어느 쪽에 마음이 더 끌리시는지 궁금합니다.

     
    결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겠다고 선언하는 비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는 겁니다. 통계청(한국의 사회 동향 20203)에 따르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20대 여성은 고작 27.5%에 그쳤습니다. 10명 중 3명도 안 되는 수치죠. 그런데 무려 18세기 초반에 비혼을 선언했던 조선시대 여성이 있다는데요. 바로 조선 후기에 쓰인 고전소설 📖‘이형경전’의 주인공 ‘형경’입니다.
    무려 300년 전, 그의 비혼 결심은 이러합니다. “내가 비록 여자이나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으리라. 세속 여자들이 지아비를 두려워하여 귀중하게 여기고, 시부모를 공경하여 밥상을 받들고 국을 맛보는 등 시중을 드는 일과 수시로 술을 빚어 손님 대접하기를 불평하며, 문을 닫고 담에 둘러싸인 깊은 규방에서 바느질이나 하는 것은 내가 차마 못할 일이니라.”
    이 소설은 최근 고전문학 연구가 이상구 순천대 명예교수에 의해 현대어로 다시 태어나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5번째 책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던 시대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형경은 부모의 반대에도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고, 남장을 한 채 자라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아예 남자로 살기로 결심하죠. '홍계월전', '정수정전', '방한림전' 등 여성영웅소설 속 남장을 한 여성은 대부분 부모 뜻에 따라 가문을 빛내거나 원수를 갚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하지만 “이형경은 오로지 사회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온몸을 던졌다는 점에서 이들과 구별된다”고 이 교수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짚었습니다

    무엇보다 형경은 소설에서 ‘남성 못지않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으로 그려지는데요. 여자로 태어나 남자의 일만 한다고 꾸짖는 부모에게 형경은 답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성인이 남긴 기풍에 따라 붓 아래 문장을 이루고, 입 가운데 직언과 정론을 머금어 임금과 부모를 섬기는 것이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소녀가 비록 여자이나 뜻은 세상의 용렬한 남자를 비웃나니, 이제부터 여자옷을 벗고 남자의 모습으로 부모를 모셔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엄격히 금기되는 시대에서 '사람'이라면 무릇 자아실현을 바란다는 형경의 말은 큰 울림을 줍니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른 형경은 문(文)뿐 아니라 무(武)에도 뛰어난 인물로 묘사됩니다. 중국 진나라의 명장 항우에 비견될 정도죠. 관가에서 승승장구할수록 형경을 사위로 삼으려 눈독 들이는 이들이 늘어나고, 또 남장여자인 그의 정체를 알아본 남자 주인공(?)까지. 설상가상 왕에게도 성별을 들킬 위기에 놓인 형경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지금 이형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무수한 쇠공이 벌써 여기 떨어졌고 떨어지는 중.
    무정한 사람들은 여기 균열이 없는 셈 치고 살아가지만,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황정은 산문 ‘누가 얼굴을 씻을까’ 中
    낙관이 갈수록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낙관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의 글을 읽습니다. 📖계간 문학동네 2023년 봄호에 실린 소설가 황정은의 글 ‘누가 얼굴을 씻을까’는 소설가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굴뚝을 빠져나온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다. 한 사람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사람의 얼굴엔 그을음이 묻었다. 서로의 얼굴을 목격한 그 둘 중 누가 얼굴을 씻을까. (중략) 굴뚝을 통과한 사람에게 그을음이 묻지 않을 도리란 없다. 말하자면 거기엔 얼굴 깨끗한 사람이 없으니,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대답 말고 다른 답은 모두 틀렸다.”
    사회적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 이동권 시위 등 ‘그런 사람들’를 향한 혐오와 비난이 쏟아질 때 황 작가는 “굴뚝 속 얼굴들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모르고 외면하고, 또 부정하는 얼굴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비극입니다. 주인공인 난장이 ‘김불이’는 굴뚝에서 사망하죠. 그러나 황 작가는 그의 부고를 들은 딸 ‘김영희’의 “회상 속에서 김불이의 쇠공은 틀림없이 쏘아올려져 허공을 가르고 있다”고 짚습니다. “솟아오른 쇠공의 목적은 낙하, 이윽고 충돌일거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그 공은 출발한 지면으로 더 묵직하게 돌아올 것이다. 바닥을 쪼개고 굴뚝을 쓰러뜨리는 균열. 그게 김불이 쇠공의 목적 아니고 뭘까.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쇠공일까.”

    #무낙# 당신의# 일상에# 문학을# 똑똑!

    한국일보 이메일 서비스 중에서 발췌 url 없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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