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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값’과 ‘헐값’ 사이···농부는 밭에서 손을 뗀다
    지금 이곳에선 2025. 1. 14. 11:07

    남태령을 넘어(3)

    ‘금값’과 ‘헐값’ 사이···농부는 밭에서 손을 뗀다

    입력 : 2025.01.14 06:00 수정 : 2025.01.14 10:59

    윤기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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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 노동자들이 지난해 11월19일 전남 해남군 산이면 예정리 배추밭에서 수확작업을 하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김치·된장국·쌈 주재료인 배추는 한국인 밥상에 공기처럼 존재한다. 마늘·양파·무·고추와 함께 정부가 민감 품목으로 지정해 연중 수급을 관리한다. 생산자나 소비자나 적정한 수준에서 값이 유지되길 원한다. 배추값은 종종 널뛰듯 오르내린다. ‘금값’과 ‘헐값’ 사이에서 배추를 키워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전전긍긍하는 농부들 이야기를 취재했다.

    푸른 밭, 노란 푯말

    배추는 연중 나온다. 가을·겨울(월동) 배추는 ‘땅끝’인 전남 해남에서 주로 자란다. 봄이 되면 충남의 비닐하우스와 경남·경북의 비닐 터널에서 출하된다. 여름엔 고도가 높은 강원 고랭지, 가을부터 다시 전남에서 생산한다.

    전남 해남 학동리 토박이 박성용씨(69)는 원래 마늘 농부였다. 배추로 바꾼 건 30여년 전부터다. 제주에서 자라던 겨울배추 종자가 해남에 들어왔다.

    상인들이 여 와서 ‘땅이 좋으니까 배추 심어보라’고 하데? 한 농가, 두 농가 심다보니 ‘농사 괜찮네’ 반응 나오면서 다 퍼졌제. 배추 단지가 커지니까 다른 상인들도 몰려오고….

    - 학동리 농부 박성용씨(69)

    온화한 날씨에다 양분 많은 붉은 황토에서 자란 해남 배추는 인기를 끌었다. 이제 해남은 전국 배추 생산량의 약 25%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 산지이다. 해남에서는 8월 하순 모판에 배추 씨를 뿌려 모종을 키운다. 9월 중순에 밭으로 옮겨 심어 가을배추는 11월까지, 겨울배추는 1~2월까지 재배한다. 다음 배추 정식 전까지 밭에선 잎담배·감자·고추 따위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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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 노동자들이 지난해 11월19일 전남 해남군 산이면 예정리 배추밭에서 수확한 배추를 그물망에 담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지난해 11월20일 학동리의 한 배추밭. 외국인 남녀 노동자 10명이 배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박씨가 “친척 동생네 밭”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이 초록색 그물망에 3포기씩 담아 끈으로 꽁꽁 묶으면, 남성들이 이를 길가로 옮겼다. 수확 날이지만 농부는 보이지 않았다.

    밭에는 ‘○주식회사’라고 적힌 노란 푯말이 꽂혀 있었다. ○주식회사가 이 밭의 배추를 통째로 샀다는 뜻이다. 이른바 ‘밭떼기’라고 불리는 포전(圃田) 거래다. 이 회사는 경기 구리에 본사를 둔 산지 유통업체다. 농부들은 산지 유통업체를 ‘상인’이라고 부른다.

    상인들은 농부들이 배추씨를 뿌리기도 전인 7월부터 해남 배추 산지를 돌아다니며 미리 구매 계약을 맺는다. 농부는 밭에 배추 모종을 옮겨 심고 물만 주면 된다. 농사를 짓는 건 상인들 몫이다. 이들은 인력을 고용해 배추밭에 농약을 뿌리고 퇴비를 주고 수확까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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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배추밭에 산지 유통업체의 노란 푯말이 꽂혀 있다. | 윤기은 기자

    초록빛으로 물든 학동리 들판 곳곳에 노란 푯말이 꽂혀 있었다. 해남 배추 농가의 85% 이상이 이런 밭떼기 방식으로 거래를 한다. 해남에서 만난 농부들은 평당 7000원 수준에 밭을 넘겼다고 했다. 이날 ○주식회사 소속 작업반장 진호성씨(62)는 지게차를 몰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수확한 배추를 5t 트럭에 싣고 있었다. 해남 배추를 실은 트럭은 서울 가락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가락시장)으로 간다고 했다.

    진씨 작업반은 전국을 돌며 배추를 수확한다. 해남에 머무는 건 오는 2월까지라고 했다. 그는 봄배추가 나오는 4~6월에는 충남 예산, 경남 의령, 경북 의성 등을 돌고, 여름배추가 나오는 7~9월엔 강원 영월·평창 등에서 일하다가, 가을배추를 수확하는 11월 다시 해남으로 돌아온다.

    “이 짓을 벌써 20년 했네.” 진씨는 화물기사로 일하다가 급등하는 화물차값을 이겨내지 못하고 20년 전 전업했다. 그는 수확지 근처에서 펜션을 빌려 생활한다. 작업반인 이주노동자 10명도 진씨와 함께 떠돌아다닌다. 그는 “작업반 한 달 숙소비만 300만원이 들어간다”고 했다.

    진씨가 속한 ○주식회사처럼 규모 있는 산지 유통업체는 수확팀, 비료팀 등 작업반이 따로 굴러간다. 밭에 꽂힌 노란 푯말에는 ‘9.12’(9월12일), ‘9.24’(9월24일), 이런 식으로 날짜가 여러 개 적혀 있었는데 앞서 다녀간 비료팀이 밭에 비료를 뿌린 날짜라고 진씨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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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배추밭 앞에 산지유통업체의 배추를 수송하는 화물차가 대기하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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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지 유통업체 직원이 지난해 11월19일 전남 해남군 예정리 배추밭 부근의 도로에서 수확 배추를 지게차에 싣고 계약을 맺은 대형트럭으로 옮기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밭떼기냐, 농협이냐

    농부들은 왜 배추를 심어놓기만 하고 마저 키우지 않는 걸까. 박씨는 “농가들이 안정적인 판로를 뚫기 어려워 밭떼기를 한다”고 했다. 농부들은 자신의 밭에서 적은 양의 배추만 생산하기 때문에 사가려는 이들이 많지 않다. 반면 산지 유통업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량을 확보하기 때문에 가락시장은 물론, 대형마트, 김치 공장 등에 배추를 공급할 수 있다. 60~70일 뒤 수확기 때 가격은 알 수 없지만, 밭떼기 계약을 체결하면 정해진 가격에 배추를 넘길 수 있어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밭떼기는 농촌의 극심한 인력난 때문에도 성행한다. 이웃끼리 농사일을 서로 돕는 품앗이가 사라진 뒤부터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이주노동자를 구하려고 해도 배추 수확철이 다가오면 일당이 뛰었다. 수확철에는 일당 15만원에도 오겠다는 사람이 없다.

    농자재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밭떼기를 한다는 이들도 있다. 해남 양정리에 사는 김명재씨(64)는 7000평(약 2.31㏊) 땅에서 배추농사를 짓는데, 이 중 5000평(약 1.65㏊)을 산지 유통업체에 밭떼기로 넘겼다.

    “농자재값이 얼마나 올랐는디… 농가 입장서는 갈수록 남는 게 없제라. 농산물값까지 싸불고 하면 1년에 2000만원 이상 손해를 보죠.”

    - 양정리 농부 김명재씨(64)

    10a(아르·약 30.25평)당 가을배추 평균 경영비(농사 비용)는 2019년 107만8868원에서 2023년 138만1542원으로 5년 만에 약 28%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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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부 이문재씨가 지난해 11월22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에 있는 자신의 배추밭에서 촬영에 응하고 있다. | 윤기은 기자

    상인 대신 지역 농협과 계약을 맺고 재배하는 농가도 있다. 해남 서상리 밭 3000평(약 0.99㏊)에서 배추 농사를 짓는 이문재씨(73)는 밭에서 난 배추를 모두 농협으로 보낸다.

    가을배추는 평당 8500원, 겨울배추는 평당 9500원에 계약했다. 상인과의 밭떼기 계약보다는 금액이 높지만, 모종 관리부터 수확까지 전 과정을 이씨가 맡는다. 농협 계약재배가 늘면 정부가 농협을 통해 사전에 배추 수급을 조절할 수 있어 배추값 폭등락을 막는 데 유리하다.

    다만 지역 농협과의 계약재배가 밭떼기 계약에 비해 큰 이점이 없다보니 참여하지 않는 농가가 많다. 농협도 지역 내 모든 배추 물량을 소화할 순 없고, 수확기에 시장 가격이 폭락하는 경우 큰 손실을 볼 수 있어 계약재배 확대에 나서지 않는다. 반면 전국을 도는 밭떼기 상인들은 겨울배추 가격이 폭락해도, 여름배추 가격이 좋으면 손실을 어느 정도 벌충하면서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몇몇 농민들은 자구책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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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 농가들과 함께 절임배추 공장인 학동농장을 운영하는 박성용(오른쪽)·박홍규 부자가 지난해 11월20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배추밭에서 인터뷰를 하며 웃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박씨 아들 홍규씨(41)는 5년 전 인천에서 고향 학동리로 귀농했다. 아버지가 상인으로부터 받는 금액을 듣고, 값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이후 내려왔다.

    (밭떼기) 편하죠. 근데 농가가 헐값을 받는 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이게 농부로서는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 절임공장 대표 박홍규씨(41)

    홍규씨는 다른 배추 농가 두 곳과 함께 영농조합을 세우고, 5억원을 투자해 절임배추 공장을 지었다. 사업은 ‘순항 중’이다. 조합 가입 농가는 안정적으로 수입을 얻는다. 소비자는 홈페이지를 통해 절임배추를 직거래하며 최소한의 물류 비용만 부담한다.

    해남에선 절임배추 사업이 성업 중이다. 절임배추 사업을 하는 농가는 배추 판매 가격을 직접 정할 수 있다. 직거래다보니 유통마진도 줄인다. 각 가정에서 간편하게 김장하려는 추세와도 맞물린다. 다만 절임배추는 김장 수요가 있는 가을배추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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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농장 절임배추 공장 노동자들이 지난해 11월20일 배추에 소금 치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경매가 올리는 ‘주문’

    지난해 11월29일 오후 11시. 서울 가락시장 내 대아청과 경매장. 팰릿째 포장된 배추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해남에서 온 배추다. 이곳에서는 배추를 경매에 부쳐 판매한다. 가락시장 내 가게가 있는 중도매인과 외부에서 온 도매상들이 경매 참여에 앞서 배추 상태를 살폈다.

    대아청과 경매사가 전동차를 타고 경매를 진행할 배추 앞으로 이동했다. 차에 붙은 전광판에 배추 수량, 품종, 생산자, 경매가 등이 나타났다. 경매가 시작됐다. “해남산 네 팰릿, (배추 3포기가 든 10㎏ 1망에) 6800원, 6900원, 7000원.” 경매 참가자들이 손에 든 경매 단말기의 버튼을 눌러댔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호가가 100원씩 올랐다. 마지막에 버튼을 누른 참가자가 배추를 낙찰받는다.

    “7100원에 허버허버허버 1089번 ○○농산.” 해남산 배추가 낙찰됐다. ‘허버허버허버’는 경매사가 경매가를 올리기 위해 외는 일종의 ‘주문’이다. ‘자이야자이야자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경매사도 있다. 이날 경매사는 ‘호가 7200원’을 기다리며 주문을 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게차 기사들이 해남산 배추를 낙찰자인 ○○농산의 트럭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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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아청과 경매사가 지난해 11월29일 서울 송파구 가락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배추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 윤기은 기자

    가락시장에서는 토요일 밤을 제외한 주 6일 배추 경매가 열린다. 전국에서 가장 큰 도매시장이다 보니, 이곳의 배추 경락가는 전국에서 거래되는 배추의 기준 가격이 된다.

    도매상이 농부나 산지 유통업체와 거래해서 가격을 결정하는 서울 강서농수산물도매시장(강서시장) 같은 곳도 있다. 농부들은 배추를 강서시장에 가져가면 종종 가락시장보다 웃돈을 얹어 팔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강서시장에서도 흥정할 때 가락시장 경락가를 기준으로 한다. 거래 농산물 양도 가락시장보다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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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서농산물도매시장 내 배추·무판매장에 판매를 앞둔 배추가 쌓여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경기 고양에서 식자재 마트를 운영하는 이모씨(51)는 매일 트럭을 몰고 가락시장으로 온다. “강서, 청량리, 영등포, 구리에도 도매시장이 있지만, 거기는 들어오는 양이 별로 없다”며 “사실상 가락시장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이씨는 이날 가락시장 경매에서 배추가 가득 쌓인 팰릿 4개(864포기)를 구입했다. 수도권 김장철이라 배추를 찾는 사람이 많단다. 다만 자신의 식자재 마트에선 배추 판매량이 전년 김장철 대비 30% 이상 줄었다고 했다.

    이날 해남산 배추의 낙찰 가격은 10㎏ 1망(3포기)에 6000~1만원 수준이었다. 이틀 전에는 전국에 내린 폭설로 1망에 1만5000원까지 올랐다. 이씨가 말했다. “식자재 마트는 구색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가격이 높아도 사야 되거든요. 오늘 많이 내려갔으니 다행이죠.”

    가락시장에서는 그날 물량이 없으면 최하품이어도 최고 가격을 받는다. 물량이 많은 날은 최상품이어도 가격이 하락한다. 품질보다는 물량이 가격을 결정하고 이게 전국 도매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치다 보니 농민과 상인들은 언제 출하해야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을지 가락시장 경락가만 바라본다.

    폭설로 급등한 배추가격은 눈이 그치고 산지에서 배추 수확이 다시 시작되면서 금세 안정화됐다. 몇 주가 지나도 가락시장 값이 안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지난해 여름배추에서 벌어졌다.

    배추값 ‘전쟁’

    경북 안동 출신 김시갑씨(72)는 중학생이던 1966년 아버지와 함께 강원 강릉 왕산면 안반데기 마을로 왔다. 안반데기는 떡메로 쌀을 칠 때 쓰는 오목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판인 ‘안반’과 비슷한 모양의 지형이라 붙은 이름이다. 해발고도 1100m로 인근 대관령(832m)보다 300m나 높다.

    해가 잘 들면서도 여름에 서늘한 안반데기에선 25도 이하에서 자라는 고랭지 작물을 키우기 적합하다. 김씨네 가족은 씨감자와 배추를 이모작으로 키웠다. 현재 김씨는 춘천에 살면서 농번기에만 안반데기에서 지낸다. 안반데기 배추는 6월 중순~7월 초에 모종을 심고 8월 중순~9월 중순 수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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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 마을 농부 김시갑씨가 지난달 9일 휴경 중인 자신의 배추밭 앞에서 촬영에 응하고 있다. | 윤기은 기자

    10년 전만 해도 김씨는 북쪽의 대관령까지 총 8만평(약 26.45㏊)의 땅에 여름배추를 심고 밭떼기로 팔았다. 지금은 규모를 줄여 3만평(약 9.92㏊)에서 지역 농협과 계약재배로 배추를 키운다. 규모를 줄인 건 배추값이 폭등과 폭락을 반복하고, 기후변화와 연작 등으로 전에 없던 ‘반쪽시들음병’ 등의 병해충이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 잎 반쪽이 노랗게 변하면서 시들고, 심하면 배추 전체가 말라 죽는 병이다. 손해를 본 상인들은 밭떼기 잔금을 다 지불하지 않고 깎기 일쑤였다.

    해발 600m 이상 고랭지 배추 재배면적은 2014년 4481㏊에서 2024년 3483㏊로 22.3% 감소했다. 특히 안반데기와 함께 ‘국내 3대 고랭지 배추 메카’로 불렸던 강원 태백 화전동 풍력발전단지 주변과 태백 삼수동 귀네미골에서 배추 농사가 크게 줄었다.

    고랭지 배추 면적이 갈수록 줄자 정부가 봄배추 저장 물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매년 정부는 폭염과 폭우 피해에 대비하기 위해 6월에 나온 봄배추를 저장했다가 8월 중순~9월 초 고랭지 여름배추 출하가 시작될 때 맞춰 가락시장에 푼다. 배추는 저온 저장하면 2~3개월 보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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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 주산지 파종·수확 시기 그래픽

    이전에는 봄배추 수천t을 풀면 여름배추 가격이 잡혔다. 생산비가 많이 드는 고랭지 여름배추 가격이 봄배추 가격 언저리에서 유지되다 보니 고랭지 농가들과 밭떼기 상인들이 비축 봄배추의 방출량을 줄여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고랭지에서 배추 농사를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막대한 손해를 본 상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생겼다. 고랭지 배추 면적은 더 빠르게 감소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안반데기 기온이 30도를 웃돌면서 수확을 앞둔 배추가 갑작스럽게 녹아버렸다. 김씨의 후배 조정래씨(70) 밭은 안반데기에서 피해가 심한 축에 들었다. 2만평(약 6.61㏊) 경작지 중 20% 땅에서 한 포기도 거두지 못했다.

    조씨는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농부가 좋아하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고생해서 키운 작물이 녹아나면 농사꾼 속이 좋겠나”라며 “‘내일은 또 어디 배추가 녹아내릴까’ 하면서 하루하루 마음을 졸였다”고 말했다. 안반데기 아랫마을인 대기리 용수골(해발고도 700m)에는 수확 자체를 포기한 농가가 속출했다.

    고랭지에서 나는 여름배추량이 크게 줄면서 가격이 급등했다. 지난해 8월 가락시장에서 10㎏ 1망이 1만5000원으로 오르더니 9월 초 2만5000원이 됐다. 9월 중순에는 1망 7만원에 낙찰된 배추도 나왔다. 가락시장 배추 경매 역대 최고가였다. 정부가 가락시장에 1만t의 비축 봄배추를 풀었지만, 이번에는 배추값을 잡지 못했다. 수입 배추 관세율을 27%에서 0%로 낮췄지만 한계가 있었다.

    김씨처럼 농협과 계약재배를 하는 농가들은 정부의 ‘채소가격안정제’에 참여한다. 생산량이 많아 가격이 폭락할 것으로 보이면 농가에 휴경을 시키거나 밭을 갈아엎도록 하고, 과소 생산으로 값이 폭등할 것이 예상되면 재배면적을 늘리거나 출하 시기를 앞당기도록 하는 제도로, 농가가 이를 이행하면 농협이 손실을 보전해준다.

    지난해 김씨의 배추도 열흘 일찍, 완전히 여물기 전에 출하됐다. 지방 도매시장, 김치 공장으로 가야 할 물량을 가락시장으로 돌렸다. 하지만 고랭지 배추 물량의 대부분은 밭떼기 상인들이 들고 있고, 농협 계약재배 물량은 많지 않다보니 수급 조절 효과는 크지 않았다. 고공행진하던 배추값은 지난해 11월 해남에서 가을배추가 나오자 진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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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 노동자들이 지난해 11월19일 전남 해남군 산이면 예정리 배추밭에서 배추를 수확하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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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해남군 산이면 예정리 배추밭 | 서성일 선임기자

    봄배추의 95%, 여름배추의 70%, 가을배추의 80%, 겨울배추의 85%가 상인들의 물량이다. 해남 예정리에서 배추 농사를 짓는 김효수 전국배추생산자협회 회장(68)은 “이래서는 배추값을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없다”며 “정부가 배추 30~50% 물량을 농협과의 계약재배로 확보하고 배추값이 널뛰기 전에 계약재배 물량으로 수급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추 작황 문제가 이어지더라도 배추값을 ‘금값’과 ‘헐값’ 사이 어느 선에서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근디 (계약재배 확대로 늘어나는) 농협의 손실을 정부가 지원해줘야제. 돈은 꽉 닫아놓고 맨날 ‘느그 알아서 해라’ 하니 농협이 무슨 이유로 하겠어요. 농협도 장사인디 손실 보면서 몬하잖아요.

    - 김효수 전국배추생산자협회 회장(68)

    이대로 가다가는 금배추 사태가 다시 벌어질 수 있다. 고랭지는 시작일 뿐, 그다음은 국내 최대 산지 해남의 배추가 될 수도 있다. <③회 끝>

    남태령을 넘어 시리즈 바로가기

    [남태령을 넘어 ①회 1] 농부가 농촌을 떠난다 https://naver.me/G58bGSV5

    [남태령을 넘어 ①회 2] “농사짓겠다고 남은 젊은 애들이 걱정이야” https://naver.me/GvcYBnFf

    [남태령을 넘어 ①회 3] “그 많은 샤인머스캣이 설에 쏟아져 나오면 어쩌지?” https://naver.me/FioIY8DB

    [남태령을 넘어 ①회 4] “마늘은 기계로 못 심어...몸 힘드니 다들 시금치로 갈아타” https://naver.me/xMjDTTXA

    [남태령을 넘어 ①회 5] “한 달 사룟값만 1억···‘대기업 종살이’ 할라” https://naver.me/IgJZ7j

    [남태령을 넘어 ②회] 사라질까 살아갈까, 두지마을에서의 한 달 https://naver.me/xWTqxNNj

     

    https://www.khan.co.kr/article/202501140600031/?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portal_news&utm_content=sub_thumb2&utm_campaign=news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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