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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 트럼프’에 말문 열어준 밴스, 미국 자유주의의 종말지금 이곳에선 2024. 11. 19. 09:49
‘샤이 트럼프’에 말문 열어준 밴스, 미국 자유주의의 종말
모호했던 트럼프주의는 이번 대선을 통해 ‘탈자유주의’라는 명확한 이름을 얻었다. 탈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밴스 부통령 당선자는 벌써부터 공화당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된다.
이종태 기자
입력 2024.11.18 06:28 호수 896
11월6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오른쪽)이 대선 승리 연설에 앞서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 부통령 후보와 포옹하고 있다. ⓒAP Photo
한국인에게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요람이자 성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2024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선택함으로써 자유주의에 전면적 사형선고를 내렸다. 모호한 개념이었던 트럼프주의(Trumpism)는 이번 대선 운동 과정을 통해 새롭고 명확한 이름을 얻었다. 포스트-리버럴리즘(post-liberalism). 억지로 번역하면, ‘탈(脫)자유주의’다.
‘자유주의로부터의 이탈’, 나아가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탈자유주의’는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보수 가톨릭계를 중심으로 확산되어온 ‘뉴라이트’ 운동이자 사상이다(한국의 뉴라이트와는 닮은 점이 전혀 없다). 트럼프의 부통령으로 당선된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는 이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84년생인 밴스는 러스트벨트(Rust Belt)에 속하는 오하이오주 출신이다. 산업이 노동자들을 버리고 떠난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동년배들 중에선 드물게 자수성가했다. 예일 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뒤 벤처 투자자로 큰돈을 벌었다. 2023년 11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회고록인 〈힐빌리의 노래〉에서 가난한 이웃들의 처지를 신랄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은 출간 당시 판매량 기준으로 아마존닷컴 1위를 기록했다.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트럼프의 책사’이며 반(反)자유주의자인 스티브 배넌은 트럼프를 예수 그리스도, 밴스를 사도 바울에 비유했다.
“예수도 사도 바울의 등장 이전엔 작은 지역의 전도자일 뿐이었다. 예수를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사도 바울의 열정이다(〈폴리티코〉 3월15일).”
바울은, 현 팔레스타인(베들레헴) 지역의 신앙 운동이었던 기독교가 로마제국 나아가 중세 유럽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발전하는 이론적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 배넌에게 트럼프가 예수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호무역, 반(反)엘리트, 반PC(정치적 올바름), 반페미니즘 등 ‘자유주의’ 교리엔 어긋나지만 정치적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슬로건들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국 ‘자유주의 체제(regime)’에 균열이 발생했다. 그러나 트럼프주의는 자신의 정당성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트럼프를 지지하지만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샤이 트럼프’가 수없이 양산되었다.
이 문제를 ‘바울’인 밴스는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지적이며 글과 말을 잘 사용한다. 탈자유주의라는 이념적 틀로 무장했다. 트럼프의 막말 난장판 포퓰리즘에 철학적 무게를 얹을 수 있다. 더욱이 젊다. 벌써부터 공화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배넌은 트럼프로 균열된 자유주의 체제가 밴스를 통해 전복되기를 원한다.
자유주의는 성공한 정치 철학이다. 인기가 높은 만큼 분파도 많아서 단순하게 정리하기 어렵다. ‘자유주의로 불리는 것들’의 공통점이 있긴 하다. ‘개인의 자유, 그리고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자유주의는 개인 각자의 이익 추구가 경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조화 및 자원의 효율적 배분으로 귀결된다고 믿는다.
개인의 자유와 이익 추구권은 자유주의에서 사실상 천부인권(天賦人權)이다. 개인이 소속된 집단(공동체) 및 국가가 개인에게 특정한 도덕(결혼, 성별 역할, 출산, 어떤 경우엔 자신의 생명에 이르기까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자유는 법률을 위반하는 경우에만 합법적 절차를 통해 박탈될 수 있다.
밴스와 공화당 주류는 어떻게 다른가
흔히 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사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국가의 시장 개입이나 복지제도 역시 ‘개인의 자유’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개인이 자유를 누리려면 일정한 수준의 자원, 다른 개인과의 평등(=공정한 경쟁) 같은 조건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개인이나 산업에 대한 공적 지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 즉 클린턴의 복지 프로그램 강화, 오바마의 자동차산업 지원, 바이든의 산업정책(반도체산업 육성) 등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고양시키는 방법론으로서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1980년대 이후 진행된 미국 주도의 지구화(트럼프주의자 시각에선 일자리를 미국에서 해외로 내보내 미국을 가난하게 만든) 흐름 역시 자유주의 정책이다. 지구화로 개인(미국인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개인까지 포함)은 국경을 넘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화는 개인주의의 공간적(세계시장) 확대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혹은 ‘규칙 기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 또한, 자유주의의 축인 ‘법치주의’를 지리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법치에서 개인 간의 경쟁과 분쟁은 국내법에 의해 규율된다. 여기서 개인을 국가, 국내법을 국제규범(유엔, WTO 등)으로 바꾸면 ‘자유주의 국제질서’란 개념에 도달한다.
국가들이 다른 나라와의 분쟁을 무력이나 내정간섭이 아니라 ‘규칙 기반’으로 해결하자는 아이디어다. 이 시스템이 출범한 20세기 중반 이전엔 강대국이 무력이나 외교적 압박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약소국에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잦았다.
물론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노골적 침략’을 ‘묵시적 침략’으로 바꾼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미국이 베트남, 중동 등 다른 지역의 전쟁에 개입하는 명분(옳든 그르든)은 주로 ‘상대방이 국제질서를 위배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다수의 약소국들이 국제규범 구성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자국의 목소리나마 낼 수 있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2021년 1월6일 워싱턴 의회 앞에 모인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고 있다. ⓒAFP PHOTO
대충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미국에서는 자유주의자나 좌파(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없다)라고 부른다.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보수적 자유주의)도 시장 자유와 국제질서에 대해선 같은 목소리를 내왔다. 이 지점이 바로 밴스 같은 탈자유주의자와 공화당 주류의 차이다. 밴스의 이념적 스승인 패트릭 드닌 노트르담 대학 교수의 의견부터 들어보자.
드닌은 2018년 발간한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자유주의가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망 추구를 전면 허용한 대가로 ‘공공선(common good)’이 파괴되면서 사회적 혼란과 불평등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미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치명적으로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보수적 가톨릭 신자인 드닌은 자유주의의 ‘개인’이란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공동체(가족·지역·종교·전통 등)에 소속되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와 무관한 ‘독립적 개인’은 추상적 허구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탈자유주의에선 공동체에게 부여된다. 드닌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필수적인 개인의 자질로 자유가 아니라 ‘욕망의 자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기여’ 등의 도덕을 꼽는다.
자유주의에서 사회를 성립시키는 것은 개인의 이기심과 경쟁이다. 도덕은 부차적 요소다.
공동체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다. 탈자유주의자들의 보호무역주의 옹호는, 지구화로 인해 미국의 노동계급 가족들이 가난해지면서 해체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족은 철저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sex)로 구성된다.
그래야 출산할 수 있고 사회의 재생산이 이뤄질 수 있을 터이다. 그래서 탈자유주의는 동성결혼, 임신중지, 혼외 성관계 등에 대단히 적대적이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뜨거웠던 이슈 중 하나인 젠더(gender) 문제 역시 ‘가족’과 관련된 주제다. 민주당식 자유주의의 확장(정체성 정치)이 ‘생물학적 성별’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 운동의 기본적 취지는 흑인, 여성,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 집단을 차별과 혐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백인 남성 등 사회적 강자로 간주되는 집단은 사회적 약자 집단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사회적 강자들이 자신의 ‘강자성(supremacy)’을 민감하게 느끼고 적절히 처신하는지에 대한 감시로 이어졌다.
백인 남성이 남미 출신 레즈비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다거나 혹은 미국 식품 회사가 동남아시아나 인도 요리를 모방한 제품을 출시하는 경우 ‘문화적 침탈(cultural appropriation)’ 혹은 인종주의자로 공격당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기득권에 기반한 공격 행위’로 간주된다.
소수자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용어가 등장했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라틴엑스(Latinx)’가 있다. 미국에선 남미 출신 남성을 라티노(Latino), 여성을 라티나(Latina)로 불렀다. 여성과 남성을 다르게 부르는 것은 성차별 아닐까? 그래서 남미 출신은 성별을 막론하고 라틴엑스로 부르자고 제안되었다. 일종의 신생 문화적 규율이다.
한국을 ‘부정적 사례’로 거론한 밴스
미국의 대표적 진보 언론인 〈뉴욕타임스〉(11월2일)에 따르면,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교실과 회의실, 영화 스튜디오와 출판사, 의회 사무실과 정치 캠페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엄격한 문화적·정치적 규범을 강요하려 했다.”
이로 인해, “2020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대다수(민주당원과 자유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까지)가 자신의 신념이 공격당할 것이라는 공포로 인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없다”라고 토로했다. 같은 해 퓨리서치 센터 조사에 따르면, ‘라틴엑스’를 사용하는 사람은 3%였으며 올해도 4%에 그쳤다.
이 신문은 이러한 정체성 정치와 관련해 “미국 사회가 진보 좌파의 문화 및 정치에 대한 엄격한 기대로부터 이탈 중이라는 조짐이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정체성 정치’의 활동가와 정치인들이 2010년대 하반기에 가장 주목한 집단은 트랜스젠더였다.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 성별과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성별이 다른 사람들이다. 2020년 대선 당시 민주당의 예비선거에선 트랜스젠더들에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안정화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gender affirming care)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상담과 심리 치료, 외과적 수술, 호르몬 제공 등이다. ‘자유주의의 확장’으로는 타당한 의제다.
그러나 유권자들에겐 큰 지지를 얻지 못한 것 같다. 트럼프 캠프는 이 문제를 이번 선거에서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2020년 예비선거 당시 해리스가 수감자 및 불법체류자 등에게 이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활동가들과 약속했다는 내용의 정치 광고에 수천만 달러를 지출한 것이다.
밴스는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를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경제·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밴스는 이를 “문화 전쟁은 계급 전쟁”이라는 슬로건으로 요약한다. 정체성 정치보다는 보수주의의 문화적 가치가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이익과 오히려 일치한다는 것이다.
패트릭 드닌 교수(오른쪽)는 ‘탈자유주의자’인 밴스 부통령 당선자(왼쪽)의 이념적 스승이다. ⓒAP Photo
드닌은 2023년에 출간한 〈체제 변혁(Regime Change)〉에서 더욱 급진적인 접근을 취했다. “평화적인” 혁명을 통해 자유주의 엘리트들을 “가족과 공동체 수호라는 공공선을 실현할 탈자유주의 엘리트로 교체하자”는 것이다.
같은 해 5월 드닌과 함께 토론회에 참석한 밴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명백한 반엘리트, 반체제 노선으로 미국의 공공선에 헌신하는 행정부로 정권을 바꾸겠다.” 그의 약속 중 첫 단계가 2024년 대선에서 실현되었다.
밴스의 탈자유주의는 공화당 주류와 다르다. 자유무역과 지구화를 비판한다. 대기업과 금융기관들도 성토한다.
강력한 금융규제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폴리티코〉 기자 이언 워드에 따르면, 밴스는 자유시장과 외교적 개입주의를 지지하는 공화당 지도부를 “미국 정부, 기업, 언론, 엔터테인먼트, 학계 등의 상층부에 자리한 자유주의 엘리트로 구성된 체제의 일부”로 간주한다. 또한 밴스는 “최고세율 인하가 정부의 우선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감세를 트레이드마크로 삼는 트럼프와도 다르다.
밴스는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반대한다. 친러파라서가 아니라 ‘규칙 기반 국제질서’ 자체를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글로벌 질서를 유지하려는 전략으로 보기 때문이다. 밴스는 미국 사회의 저출산 및 고령화 역시 자유주의의 폐해로 간주하면서 한국을 부정적 사례로 거론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미국은 인구구조가 뒤집힌 사회가 될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은퇴자들이 점점 더 적은 수의 젊은이들에 의해 부양된다. 한국처럼 아이들이 줄어들면서 학교조차 제대로 채우기 힘들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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