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인간의 잔혹함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
    문화 광장 2008. 12. 2. 10:36

     

     

     

    인간의 잔혹함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  

     

    눈먼 자들의 도시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시선이 가장 처음으로 머무르는 곳이 얼굴 그중에서도 ‘눈’ 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그게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저 하나의 물체와 다를 게 없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거리나 제아무리 좋은 명품이라도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그저 다 헛것에 불과하다.

    눈은 무엇을 의미 할까? 눈은 우리의 모든 지각 행동을 지시하고 도달하게 하고 느끼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지시계 같은 것이다.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물체를 확인하고, 색, 모양, 움직임을 관찰한다. 그리고  타인의 모습뿐만이 아닌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게 된다.

    엊그제 마감을 끝내고서 친구와 줄리안 무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를 보았다.

     

    눈은 타자와의 소통구: 영화 시작과 함께 귀청을 때리는 소음과 보기만 해도 짜증이 엄습하는 도시의 교통체증...그 교통체증의 원인은 한 젊은 남자가 갑자기 대로에서 앞이 안보여서 도로 중앙에서 차를 세우고 떠나질 않아서 화가 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크략숀을 눌러 대는 소리였다.

    잠시 후 어떤 젊은 남자가 스스로 자청하여 이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운전대를 잡았다. 눈이 왜 그러느냐? 정말 안 보이느냐? 집이 어디냐? 하면서 너스래를 떨던 이 남자 눈이 먼 사람이 잠시 안도하는 틈을 타서 어느 거리에서 맹인이 된 이 남자를 갑자기 내려놓은 채 바로 차를 갖고 가 버리고 만다. 이번엔 도로 한가운데서 차도 없이 선 채 도움을 청한다. 다시 또 누군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집에 돌아온 남자, 두 눈으로 상대방을 볼 수 없기에 낯선 이와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워 서둘러 낯선 이를 내보낸다. 내가 만약 이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 아마도 미처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아니 차라리 미처 버리면 낮지, 미처 버리고 싶은데 미쳐지지 않는 상황, 그리고 의식이 또렷한 채로 미친 세상을 똑바로 직시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다면 아마도 의식이 마비가 더 나은 환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밤인지 낮인지가 구분이 안 되는 세계에서 과연 인간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티며 살아갈 수 있을까 ?  

     

    영화 도입부 : 그를 치료했던 의사, 그리고 그의 차를 훔쳐 갔던 사람, 그리고 다시 그 사람들과 접촉했던 이들이 차례차례로 눈이 멀게 되어 시설에 감금당하게 된다.

    시설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이 얼마 동안인지는(며칠인지 몇 달인지) 알 수 없으나 사람이란 인권을 가진 이가 받는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소 돼지보다 못한 생활을 하게 된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 눈먼 자들의 도시.

    수용소에는 단 한명의 눈 뜬 자, 애초에 눈이 멀게 된 일본인 남자를 치료했던 의사(마크 러팔로)의 아내(줄리안 무어)가 남편을 혼자 보낼 수 없어서 같이 눈 이 먼 척을 하며 수용소에 들어오게 되는 데 영화는 이 여자의 시각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사실 말 그대로 영화는 눈먼 자들의 도시만을 그렸기 때문에 영화는 눈뜬 자의 입장에서 보일 수 밖에 없다. 아무도 볼 수 없는데 혼자만 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혼자만이 느껴야 하기 때문에 참혹한  고통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이 안보이기 때문에 서로 밀치고 물건에 걸려서 넘어지고 여기저기서 소·대변을 아무렇게나 보고, 그리고 다시 그 부산물들을 밟고 돌아다니면서 이들은 몸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점점 삭막해지고 만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이를 치워 주지도 않은 채 지옥과 다름없는 나날의 연속이 소개된다.

     

     * 총을갖은악당과 식량을타내기위해 사투하는 눈든자 줄리안무어

      

    눈 먼 자들의 도시: 눈뜬장님들의 세계는 인권이라던가 도덕이라던가 하는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조건마저 지켜지지 않은 채 힘 있는 자들의 횡포가 점점 더 극에 달해지게 되고, 단 한사람의 눈 뜬 자가 목격하는 이런 장면들은 사람의 탈을 쓴 동물과 다를 게 없는 세상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존엄성이 파괴된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영화는 사회질서나 인권이 파괴된 도시에서는 부나 명예나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필요 없는 그저 당장 먹을 수 있는 빵 한쪽, 물 한잔만도 못함을 보여준다. 식량을 배급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마치 교도소에서 죄지은 이들을 가두듯이 배려의 '배’자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이 되고 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먼 자들을 수용해 놓고서, 총을든 경비들은 선 밖으로 나오면 쏜다고 엄포를 한다. 

    영화의 중후반 까지, 눈 먼 자들만 존재하는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이 묘사된다.

    매우 끔찍하고 잔인하게.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인간의 기본적 생존 본능에 점령당한 인간들의 아귀다툼과 무질서의 극치를 보여준다. 전염병이 옮을까봐 정부는 이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면서 스스로 나누어 먹으라고 한다. 남이 가진 것이 얼마큼인지가 보이지 않으니 이미 똑같이 정량을 나눠 먹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이중에서 나중에 수용소로 들어오게 된 한 남자가 총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눈 먼 이들에게 이 총이 보일 리 만무, 헛총질을 해대면서, 그는 식량을 배급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인간사회의 물물교환이 생성된다. 그는 식량을 그냥 줄 수 없으니 갖고 있는 보석이나 물건을 갖고 오면 식량을 주겠다고 한다. 차고 있던 시계 목걸이 반지 가위 등 모든 물건을 받고, 식량을 나눠주다가 이제는 더 줄 그 무엇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여자들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서로 눈치만 보던 여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식량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그들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여기서 집단 강간이 일어나고, 섹스를 하면서도 자기 맘에 안 든다고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여자들을 마구 주먹으로 때리던 이들 악마들...결국은 한 여자가 죽고 만다. 여자들이 먹을 것을 갖고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이들은 먹을 것은 없었고, 자기 여자들만 유린당한 채 오는 것을 보면서 모멸감을 느끼지만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손도 쓰지 못한다. 눈이 안 보이는 이들은 분노할 줄도 모르는 것처럼, 아니 분노라는 단어를 까먹은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무기력함만 보여주고 있다.

    눈 먼 자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이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만 보던 그녀(줄리안 무어)는 결국 총

     을 가진 남자를 가위로 찔러 죽이고 만다.

    이때의 그 통쾌함 이란 아마 나라도 그리 했을 것만 같다. 그놈들에게 당했던 또 다른 여자가 수용소에

    을 지르게 되고 이젠 아무도 감시하는 이 조차 없는 수용소를 탈출한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않았다

    고 해서 도시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빌딩들은 비어 있었고, 도로엔 날아다니는 쓰레기들

    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거리로,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동물만

    큼도 못한 비참한 세상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 수보다 더 많은 것들이 도로 위를 가득 메우고

    었는데 그것은 눈 뜬 자들의 세상에서 사용되었을 각종 세간 살이 들과 옷가지들이었다.  그 쓰레기 더

    미 속에서 가끔씩은 이미 죽은 자들이 쓰레기들과 함께 널 부러져 있었고, 사람들과 똑같이 굶은 개들

    이  누워서 썩어 가는 시체속 내장을 죽어라 달려들어 파먹는 광경도 나왔다. (아마도 이 장면은 죽어

    도 잊혀 지지 않을 만큼 충격이었다)

    혼돈의 생지옥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 수용소에서 탈출해 나와서 이미보이지는 않지만 혼돈의 무질서를 경험하는 이들

     

     

    * 서로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은채 거리로나서는 사람들

     

    기대 혹은 희망?  : 줄리안 무어는 그를 따라 나섰던 사람들과 가까스로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여기서 오랜만에 안도감과 안식을 찾는다.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먹는 것과 입을 것과 잠자리가 보장되는 순간을 맞는다. 그리고 같이 목욕을 하면서, 그들은 그동안에 같이 경험했던 아픈 기억들도 같이 씻어 내려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맨 처음에 눈이 멀었던 이가 “당신이 의사 부인이 맞죠?” 하면서 당신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동안 눈 뜬 장님이 되어서 이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졌던 줄리안 무어는 왼지 당황한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자기 눈도 보일 것 이라는 대책 없는 희망을 품게 된다.

    최초에 눈이 멀었던 이가 다시 보이게 되므로 그들도 다시 눈을 뜨게 될 것이란 것을 믿고 싶어 한다.

    그동안 눈 먼 자들과 함께 하면서 익숙해 졌던 시간들이 이제 끝나 가는 것을 의식하면서 여태까지 눈을 뜨고 있던 줄리안 무어. 그녀의 독백이 긴 여운이 남는다.

     

    '눈이 보이는 나는 무엇을 깨달은 걸까?’ 이 영화를 보고 내가 깨달은 것은 또 무엇인가 ? 

    인간이 극한상황에 다달았을 때 어떤 행동까지 할 수 있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준 영화 같다. 너무도 선명하게 피부로 느끼는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

    마치 내가 눈 멀었던 것처럼 .......................

    눈 먼 자들의 도시에는 트래픽이 없다. 물론 질서도 없고, 인권도 없고, 윤리나 도덕 또한 없다.

    당연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지만 단 하나 있는 게 있다. 혼돈과 무질서 속의 거대한 죽은 도시만 있다. 혼돈의 도시에서는 인간도 동물도 다 똑같다는 것,

    먹을 찾아 헤매는 이리떼와 다를 게 없다는 것, 혼돈의 사회에서 인간의 잔혹함의 끝도 한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눈이 멀게 되어 타인의 모습,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 파멸된 사회는 약탈, 폭력, 그리고 강간까지 서슴없이 일어나고 동물적 본성만 남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린 도시에서 홀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 과연 불행일까? 다행일까 ? 아무리 영화 였지만 잠시동안 눈먼자들과 함께 경험하고, 느껐던 감정들이 오랫동안 진드기같이 남아 있던 영화 였다.

     

    원작: 주제사라마구

    감독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주연 : 줄리안 무어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