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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기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
    수지생각 2008. 9. 16. 14:13

    신문기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2008/09/08 19:38

    기자가 되는 길은 쉬운 듯 어렵다. 별다른 재주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학력이나 연령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론고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작문 및 상식, 한자, 영어 공부를 하고 또 스터디를 해가면서 까지 신문사와 방송사의 입사시험에 몰두한다. 그 좁은 문을 뚫고 기자가 된 사람들은 필히 평균 이상의 우수한 두뇌와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일게다.

    그런데 그 힘든 과정과는 의외로, 정작 한국의 기자들의 업무 능력은 그다지 특출나지 않다. 예전에 삼성 이건희 회장이 한국의 "기업은 2류요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정치는 4류다" 라고 말해서 논란이 되었었다.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이건희 회장 식으로 말하면 (즉 업계 구성원들의 국제 경쟁력으로 따지자면) 한국의 언론은 4류 아니면 5류 정도 될 것 같다.

    지난 5년간 영자신문 기자로 근무하면서 내가 얻었던 행운이 있다. 미국이나 영국, 홍콩 등의 영문 매체들을 자주 접하고 읽고 또 공부할 수 있었고, 또 영어문화권에서 기자나 에디터로 일해온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또 그들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한국어 신문들이 얼마나 저널리즘의 기본과 기초조차 지키고 있지 못하고 있는가를 현장에서 목도하게 되었다. 짧은 경력에 주제넘은 일이지만, 그래서 나의 경험 및 실수로부터 배웠던 것 몇 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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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언론은 개발도상국 수준임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 영국 등 영어 문화권에서는 신문이라는 매체가 생긴지 이미 수백년이고 또 그러는 동안 저널리즘의 기본이 서서히 확립되었다. 이웃 일본 역시 꼼꼼한 기록 문화를 바탕으로 백 년 이상 된 신문들이 번성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신문은 역사가 짧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또 정부 기관지가 아닌 독립 자본으로서 신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일제시대에 생겨났지만 그나마도 일본 점령정부 체제에서는 정상적인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해왔다고 하기가 힘들다. 해방 후에도 오랜 군부의 독제 아래 정부의 검열, 또 때로는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우물안 개구리처럼 주는 떡밥만 먹으며, 혹은 정부와 대립하는데 이념적, 감정적인 에너지를 쏟으며 커 온 것이 한국의 신문사와 방송사들이다. 그러니 서구처럼 차가운 논리와 비평정신에 바탕을 둔 저널리즘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해야 지난 20여년 간에 불과하다. 정신없는 속도로 정치와 경제의 발전을 이루는 동안 언론 발전의 속도는 이를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한국에는 올해 세명대학교에 생기기 전까지는 이제껏 단 하나의 저널리즘 스쿨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자가 되기도 어렵지만 제대로 된 기자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또 언어 사용 인구의 한계도 있다. 한국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효율적인 언어이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이 언어의 잠재력을 아직 충분히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영어는 영국 이외에도 전세계 수억명의 인구가 모국어 혹은 제2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수많은 어휘와 용법이 추가되고 삭제되기를 반복하고 있으며 또 수많은 신문들이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고 벤치마킹 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존경받는 영문 저널리즘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은 해외 교포 커뮤니티를 제외하면 한반도 안에서만 쓰이는 언어로서, 특히 분단이라는 상황 때문에 그 쓰임새의 풀 자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그 어휘와 사용법을 발전시켜나가기에 벅차다.

    여러가지를 고려해 볼때 한국 언론의 수준은 국민소득 1만 달러 국가에 어울리는 그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에는 모두 우리보다 존경받는 신문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프랑스의 르몽드, 일본의 아사히, 요미우리 신문, 싱가포르의 스트레이트 타임스 등 잘사는 나라에는 모두 대표적인, 그리고 논조의 좌 우 여부를 떠나 전 국민의 신뢰를 받는 신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대표 일간지들 -- 조선, 한겨레, 중앙, 경향, 동아 등 -- 은 그만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심지어 애독자라고 할지라도 신문에 나온 기사들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는 한국인은 없으며 모두 나름대로의 색안경을 끼고 기사를 읽는다. 이것은 좌파냐 우파냐 친미냐 반미냐의 이념 문제가 아니다. 친미 매체이던 반미 매체이던 간에 한국 신문들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자체를 충실히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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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수준은 그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한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는 행정부(정부)-입법부(국회)-사법부(법원)의 삼권 분립 체제를 갖추고 있으나, 사실상 현대에서는 그러한 전통적인 삼각형 체제는 의미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행정부와 사법부는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조직체이다. 법원의 재판관들은 사실상 공무원으로서 특히 대법원이 내리는 판결은 정부나 청와대로부터 독립적이지 않고 대통령의 의중과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기 마련이다.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할 사법부의 역할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현대 민주국가의 새로운 3권 분립은 민간 (private sector) - 정부 (public sector) - 언론 및 국회 (media & assembly) 로 이루어 지고 있다. 민간은 일반 가정, 기업, 자영업자, 소비자 등 모든 경제주체를 의미한다. 이들이 경제발전을 이끌어간다. 정부는 이 민간을 규제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다시 이 정부는 언론의 보도와 국회의원의 국정감사 등으로부터 감시와 견제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민간은 언론을 선택하고 국회를 선출함으로써 커다란 원형의 루프를 완성하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 세력 (private, public, media) 간의 연결고리가 원활하게 작동해야 한다. 민간-정부, 정부-언론, 언론-민간의 세가지 고리 중에서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더이상 발전할 수 없다.

    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국가들은 민간-정부의 첫 번째 고리가 작동하지 않는 예이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콜롬비아 같은 나라는 정부 조직이 민간을 제대로 콘트롤하지 못한다. 그래서 총과 폭탄을 든 무장단체가 날뛰어도 그들은 제압하지 못하며 거대한 마약 카르텔이 한 지방을 점거해도 그들과 싸우지 못한다.

    한국은 정부-언론의 두번째 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나라이다. 특히 언론이 정부를 제대로 감시하고 견제하고 있지 못하다. 언론이 제 할 일을 못하면 정부는 민간 앞에 안하무인이 된다. 민간에서 뽑아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정부인데 그 민간을 키워주기는 커녕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운영되게 된다. 물론 정부 내에도 감사원 등의 자체정화 시스템이 있지만 그 역시 크게 보아서는 정부의 일부분일 뿐이요, 그들이 보기 싫은 일에 대해서는 눈을 가리고 듣기 싫은 소리에는 귀를 막아 버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심지어 정부가 제정한 법률을 정부 스스로가 제대로 지키지 않거나 범법을 눈감아버리기도 한다. 부자에게던 가난뱅이에게던 대한민국의 법은 권위가 없다. 재벌부터 포장마차 주인까지 소득세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단속하지 않고, 거리에서는 교통법규 위반인 짙은 썬팅을 한 차량들이 늘어나지만 경찰은 알고도 단속하지 않는 등 정부 스스로가 법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를 지적해야 하는 언론 역시 조용하기만 하다. 언론이 조용하면 과연 누가 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가.


    공무원들이 항상 복지부동이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공무원 사회에는 공직자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일종의 엘리트 주의가 있었다. 명문대-고시 출신의 공무원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대신 국가의 발전을 위한 키잡이 역할을 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들이 가난하고 민간 부분의 경쟁력이 낮았던 개발 독재 시대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민간 부분의 경쟁력이 공공 부분의 경쟁력을 현저하게 능가하고 있으며 고학력, 고능력의 적극적인 인재들 역시 민간 부분에서 대부분 끌어가고 있고 공무원 사회에는 이제 직업 안정성만을 추구하는 수동적인 구직자들이 달라붙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무원들은 더이상 엘리트가 아니다. 공직사회의 자부심과 윤리의식이 사라진 지금 그래서 공무원들은 복지부동과 권력형 비리에 더더욱 취약해 진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언론이 붙잡아줘야 한다. 그래야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 현대, SK 그룹 등 대기업 집단들의 막대한 기업회계 비리 사건들이 드러났을 때 우리의 언론은 경제 성장을 위한다는 논리로 법질서를 옹호하지 못하였다. 언론이 비리에 대해 날을 세우지는 못할 망정 사설 및 기사를 통해 범죄자들을 감싸기를 계속하니, 정부의 공무원들과 검사들, 법원의 판사들 또한 이러한 기업 범죄자들을 느슨하게 처벌하거나 사실상 용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제 한국은 기본적 룰도 지켜지지 않는, 제대로 된 시장경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지는 이를 두고 "화이트 콜라 범죄에 대한 한국의 악명높은 관대함" 이라고 비웃었다.

    법질서가 지켜지지 않는 나라에서는 무법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이나 소비자 들이 소비해야하는 시간과 노력, 돈 등의 사회적 코스트가 너무나 크다. 그래서 이러한 低신뢰 사회는 아무리 재벌들이 많은 돈을 벌어다 주어도 결코 선진국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나라의 전반적인 수준이 개발도상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삼성이던 현대던 개별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1류이건 2류이건 의미가 없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이다. 언론이 정부를 감시하고 다시 그 정부가 기업 및 민간 주체들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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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언론-민간의 고리는 제대로 작동하는가?  이 역시 대답은 No. 이다. 우리 언론사들은 광고수익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선진국의 매체들보다 높다고 한다. 단순 비율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성격이다. 기업들은 광고를 낼 때 그 매체의 신뢰도나 평판보다는 부수를 우선 고려한다. 그리고 광고를 주는 대신에 이른바 "빨아주는" 기사를 요구하기도 하고 나쁜 기사는 덜 나쁘게 쓰거나 아예 빼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 독자들의 목소리는 잘 반영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목소리 자체가 작다. 한국의 독자들은 좋은 신문 나쁜 신문을 잘 가려 보지 않고, 그냥 남들 많이 보는 신문을 보거나 아니면 예전부터 보던 신문을 계속 보는 관성이 있다. 또 자전거나 상품권 등 금전적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한다.  이러니 신문사들은 독자를 무섭게가 아니라 우습게본다.  낮은 시민의식 - 제멋대로인 언론 - 무능한 정부 - 낮은 시민의식의 악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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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산업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사람들은 그동안의 관성이 있기 때문에 구습의 틀을 깨기 힘들다. 그러나 새로이 언론계로 들어오는 젊은 사람들은 그러한 고정관념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다. 또한 요새 뽑는 기자들은 대부분 영어는 기본적으로 왠만큼 읽고 말할 수 있으므로 오래된 기자들에 비해 해외 언론의 저널리즘으로부터 더 쉽게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좋은 멘토이다. 한국에도 빨리 제대로 된 저널리즘 스쿨 같은 언론 교육기관이 생기고 해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저널리즘의 수준을 끌어올려줘야 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이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미안하게도 한국 언론은 영어 언론에 비하여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비참한 수준에 와 있다. 주위에서 제대로 된 저널리즘을 멘토가 흔하지 않은 현실에서 남은 선택은 외국의 언론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한국의 기자들은 "입닥치고 공부해야" 할 시간이다.

    5년 밖에 안되는 우스운 경력이지만, 그동안 내가 느끼고 경험하고 공부하고 또 배우던 중 한국에서 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명심했으면 하고 생각하는 점들이 있다.


    1. 취재원과 친구가 되지 마라

    A 일보의 사회부의 고참 김개똥 기자는  xx시 시청을 출입한다. 다른 모든 유력지 기자들이 그렇듯 그는 거의 매일 점심을 서울 시청의 각 부 국장들과 함께 인근 음식점에서 먹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은 2차까지 가는 술자리를 갖는다. 물론 스스로 돈을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루는 시청 공보실 주최로 기자단 회식이 있었다. 시청 인근 값비싼 한우 고깃집에서 열린 이 회식에서는 30년산 위스키가 십수병 뿌려졌으며 (물론 시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것이다) 시청의 고위 공무원들과 기자들간의 폭탄주 러브샷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기자단 전원이 참석한 1차는 열 시 경에 끝났는데, 이후 몇몇 "핵심멤버"들과 공무원 몇명은 2차로 단란주점으로 향했는데 물론 김개똥 기자도 빠지지 않았다. 또한번 거나한 폭탄주가 수십잔 오고간 끝에, 평소에 술친구였던 한 국장급 공무원이 풀린 눈으로 개똥 기자에게 말했다. "어이 김 형, 이거 김 형만 알고 있어. 이번주 금요일에 **구에 뉴타운 개발 계획 발표할거야. 이미 검토 다 끝내서 결재까지 받고 지금 보도자료 만들고 있는 중이야. 내가 김 형한테만 특별히 얘기해주는 거니까 절대 내가 얘기했다고 하면 안돼, 알지?"  김개똥 기자는 "아 그럼 내가 설마 이 형 배신하겠어~  이 형이 이런 사업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거 보니까 조만간 부시장으로 승진하는거 아냐?" 라고 담당 공무원을 띄워주고 폭탄주 한 샷을 더 권한다.

    다음날 김개똥은 해당 지역을 방문하여 부동산을 몇군데 돌면서 집값 동향을 묻는 등 보충취재를 하고, 다음날 조판용으로 특종 기사를 쓴다. 제목은 "**시 **구 뉴타운 개발 계획 확정."  기사중에는 "본지 기자가 관계자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이라는 멘트만 들어있을 뿐 공무원의 이름은 빠져있다. 아침에 기자실로 출근하니 다른 일간지들의 기자들이 "한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개똥 기자에게 물먹은 그들은 시청 대변인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여, 금요일에 나가기로 되어있던 보도자료가 그날 목요일 오전에 당겨나가게 되었다. 금요일에 모든 스케줄을 맞춰놓았던 담당부서 공무원들은 죽을 맛이다. 한편 특종을 한 개똥 기자는 회사로부터 칭찬도 받고 기분도 좋다. "이런 맛에 기자 하는거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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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은 서울시청 출입기자의 경험에 일부 바탕을 둔 픽션이다. 한국 언론사에서 흔하게 나오는 "특종"을 잡는 일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개똥과장과 같은 많은 기자들은 정부 공무원으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무진장 밥을 같이 먹고 또 술을 같이 마시고 또 퇴폐안마와 성접대도 받는다. 물론 그 돈은 다 세금이다.

    그래서 얻은 이른바 "특종"이라는 것은 사실상 사회 전체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 경우가 많다. 위의 경우 개똥기자의 특종도 본인과 가문의 영광일지는 모르나, 어차피 발표되기로 되어있던 계획을 며칠 앞당긴 것일 뿐,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개똥 기자의 특종으로 인한 득은 전혀 없다. 오히려 시청 행정에 혼란만 준 셈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단 "특종"을 먹여준 이상 김개똥 기자는 정보를 준 담당 공무원에게 항상 빚진 기분이 될 것이다. 그 공무원이 이후에 어떤 잘못이나 비리를 저질렀을 때, 혹은 그 공무원이 속한 부서에서 맡은 업무에 미심쩍은 일이 생겼을 때면 개똥기자는 왠만하면 기사를 쓰지 않게 되거나 쓰더라도 그에게 개인적인 피해가 가는 상황은 막으려고 본인도 모르게 노력하게 된다. 한국인은 정에 약하다.

    실례로 작년에 과천 농림수산부에 출입하던 기자들과 공무원들이 단체로 안마시술소에서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된 적이 있다. (기사 참조)  외국 같았으면 온나라가 벌컥 뒤집혀야 했을 이 사건은 농림부와 농촌공사 등 공무원 3명과 기자 2명이 불구속되는 것으로 흐지부지 끝났다. 그나마 이 사건이 보도된 것은 그 자리에 끼지 못했던 한 마이너 매체의 기자가 터뜨렸기 때문이다.

    국민의 세금을 이렇게 어이없게 날려버린 이 범죄자 공무원들이 누군지, 그리고 도덕심을 땅에 버린 기자들이 속한 언론사가 대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신문사도 방송사도 밝히지 않았다. 기자들 대부분이 평상시에 공무원들로부터 밥얻어먹고 술얻어먹고 성접대받으며 친분을 쌓아온 것이 관행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형 사건도 눈감아주는 마당에, 농림부의 다른 비리와 의혹에 대해서 이 안마방 동무 기자들이 제대로 기사를 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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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원과 친구가 되지 말라는 말은 처음 체육부에 축구담당으로 발령받았을 때 부장이었던 앤드류 캐롤이 일러준 말이다. "(축구협회 사람들과) 친구가 되려 하지 마라. 네가 듣고싶은 정보가 있으면 물어보지만 그 이상을 바라지는 말아라."

    굳이 취재원과의 질펀한 술자리를 만들어서 취중에 말실수 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그들이 공식 브리핑에서 전해주는 정보만으로도 얼마든지 고급 기사를 써낼 수가 있다. 뉴욕타임스, 아사히 신문,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등의 한국 특파원들은 정부기관에 "출입"하거나 공무원들과 양주 폭탄주를 마시지 않아도 긴 안목에서 바라보는 깊이있는 기사들을 잘들 써낸다. 그런 기사들이야말로 몇 년이 지난 후에 보아도 의미가 퇴색치 않는다.

    물론, 기자 개인에게 있어 인맥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맥을 넓히라는 것이 취재원과 한통속이 되라는 뜻은 아니다. 기자의 본분은 보도이고 기자의 고객은 독자들, 더 나아가 국민들이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취재원, 정보소스라도 가차없이 비판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자 개개인의 승진이 아닌 언론산업 전체의 운명을 놓고 고민해 보자. 기자들과 취재원이 폭탄주로 형제가 되는 사회보다는 기자들과 취재원이 서로 뻣뻣하고 대립하고 줄 것만 주고 받을 것만 받는 사회가 바람직하고 건전하고 깨끗하지 않겠는가.

    술자리에서 듣는 정보가 고급정보라고들 생각하지만, 2년 3년 지나고 생각해보면 결국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건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다른 기자 누군가는 한다. 한국의 기자들은 다들 술도 잘 먹고 정보도 잘 물어온다. 우리 언론업계에 부족한 건 이렇게 정보를 물어오는 정보원(stringer) 혹은 보도원 (reporter)이 아니라, 주어진 정보들을 잘 분석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공정하게 보도할 수 있는 차가운 머리를 지닌 사람, 바로 저널리스트 (journalist)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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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원과 친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은 정부 출입 기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작년에 국가대표 축구선수인 이운재 김상식 우성용 이동국이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안컵 경기를 앞두고 현지 노래주점에서 접대부와 함께 술을 마셨던 것이 드러나 국가대표 자격 상실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현장에 있었던 친구 기자가 얘기해준 바로는 당시 술을 마신 선수는 이 네 명 뿐만이 아니었으며 ("생각해봐. 이**가 이런 자리에 빠지겠냐?") 심지어 그 친구를 비롯한 기자들 역시 같은 룸싸롱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이 사건 역시 묻혀질 뻔 하다가 현지 교민의 제보를 받은 뉴시스 기자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뉴시스 기자는 아마도 축구협회관계자는 물론 기자들 사이에서도 그 이후로 알게 모르게 따가운 눈총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국가대표 선수들의 기강 해이 문제가 이슈가 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 축구선수들과 축구협회들이 정신차리고 긴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언론이 취해야 할 태도이다. 취재원들과 같이 룸싸롱에서 폭탄주 잘 먹는게 자랑이 아니다.


    2. 실명 취재는 기사의 생명

    김개똥 기자는 뉴타운 기사를 쓰면서 담당 공무원의 이름이나 직무를 밝히지 않았다.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이 정보를 신뢰해야 할지 아닐지 알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기사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그 이틀 빨리 나온 기사로 인해 열받은 시장이 뉴타운 사업을 전면 철회해버렸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거기서 오는 부동산 시장과 시청 행정의 대 혼란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마 개똥 기자는 "본지 특종 이후 뉴타운 계획 백지화" 라고 신나서 기사를 쓰겠지만 사실 그는 사회에 해악을 끼친 셈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개똥 기자와 담당 공무원이 져야 하는데, 한국 언론의 현실 상 이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기자는 특종했다고 회사한테 칭찬받고 끝난 문제이고 공무원은 익명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자들은 흔히 "관계자"  "정부 당국자"  "고위 인사" "소식통" "업계 전문가" 이란 용어들을 써서 취재원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영문 저널리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허접한 동네 신문이라도 이렇게 쓰지 않는다. 저널리즘의 기본은 기사나 사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identify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축구 기사에서도 "상대 수비수의 발을 맞고 골이 들어갔다" 라는 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수비수 김철수의 오른 발을 맞고" 라는 식으로 확실히 이름을 밝혀주는 것이 기자의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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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나온 머니투데이의 춘사영화제 관련 기사를 보자. 영화 "크로싱"이 상 여덟개를 탔는데, 작품성에 비해서 너무 많은 상을 탄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있다는 것이 이 기사의 요지이다. 그런데 이런 기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fact 란 이른바 "영화 관계자" 라는 사람의 멘트 하나 뿐이다. 이 사람이 할 말을 한 것이라면 이름을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정녕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면 대체 어떤 관계자인지, 배우인지, 감독인지, 극장 매표소 직원인지, 아니면 대상을 놓고 경쟁한 작품의 제작사 대표인지 등등을 밝혀주었어야만 비로소 이 멘트에 의미가 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관계자"라는 말로 달랑 넘어가버리면 기자가 자기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서 실제로 아무도 하지 않은 멘트를 만들어내었거나, 그게 아니면 "크로싱"을 시기하는 측의 사주를 받고 기사를 썼다는 의혹밖에는 남지 않는다. 문화나 스포츠 기사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정부 관련 기사이다. 정부에서 어떤 중요한 정책을 발표했는데 누가 이 정책의 책임자이고 담당자인지를 밝히지 않고 그저 "정부 관계자"라고 말하고 넘어가면 나중에 그 정책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논란이 많은 부동산 종부세를 처음 도입할 당시에 기자실 브리핑에 나왔던 담당 건설교통부 실무자들은 하나같이 이 방안이 옳고 또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나니 이제 그 사람들은 어디가 있는지 찾아볼 수도 없다. 이건 단순히 정권만을 탓할 것이 아니다.

    특히나 공무원들은 순환보직 제도가 있어서 보통 2년 정도마다 부서 이동을 한다. 그러니 어떤 중요하고 민감한 정책을 맡았다가 잘못해서 말아먹어도 1-2년만 버티고 다른 부서로 옮겨버리면 그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라는 말이 있듯이 정부 정책에 있어서 단순히 "정부 잘못" 아니면 "건교부 잘못" 이런 식으로 뭉뚱그려 비난하는 것은 결국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정부도 그렇고 건교부도 추상적 집합명사에 불과하다. 정부의 특정 공무원들이 잘못하는 것이지 생물이 아니라 추상명사인 정부는 잘못을 할 수가 없다.

    영화 넘버 3 에서 최민식이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X같아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야. 솔직히 그 죄가 무슨 잘못이 있어. 그걸 저지른 사람놈의 XX가 잘못이지."  맞는 말이다. 잘한 일은 잘한 사람이 칭찬받을 수 있도록, 잘못한 일은 잘못한 사람이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기사에 나오는 사람은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직책이라도 꼭 사람의 이름과 직책을 밝혀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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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들이 정부 공무원들의 실명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친분있는 공무원들의 책임 회피를 돕기 위해서가 대부분이다. 기사는 쓰되, 기자와 공무원간에 서로 피곤한 일은 만들지 말자는 심산이다. 심지어 청와대 대변인인 이동관씨는 브리핑에서 자기가 발표한 내용을 두고 실명을 쓰지 말라고 요구했고 청와대 기자들은 별 문제의식 없이 요청을 들어주었다. (미디어오늘 기사 참조)  공식적인 언론 담당 창구인 대변인마저 익명을 요구할 정도이면 우리 언론계의 익명 보도 관행이 정말 갈 때 까지 간 것이다.

    공무원이 공무에 대한 기사에 대해서 익명 요구를 한다고 해서 기자가 그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1번에서 말했듯이 기자가 취재원과 친구처럼 지내기 때문에 보도의 본분을 잊고 슬그머니 익명의 그늘아래 숨겨주는 것이다. 익명보도는 취재원이 억울한 피해를 당할 수 있을 때에만 최소한으로 해야한다. 그리고 익명처리를 할 때면 반드시 왜 실명을 밝히지 못하는지 (무서워서? 보복이 두려워서? 이름이 밝혀지면 쫓겨날 처지라서?) 그리고 이 사람이 이 일에 대해 어떤 지위와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를 분명히 적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사에 의미가 실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한국에도 실명보도의 원칙이 조금씩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 같다.

     

    3. 따옴표는 따오는 말에만 쓰라고 해서 따옴표이다.

    큰 따옴표는 신성하다. 영어로는 quotation mark 라고 하는 "  " 이 문장부호는 말 그대로 어떤 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베껴올 때만 써야 한다. 특별한 경우 아니면 수정이나 편집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 언론들은 따옴표를 남발한다. 취재원이 하지도 않은 말에 따옴표를 치거나 아니면 한 말을 기자 멋대로 요약하거나 해석한 후에 그 좌우에다가 마치 진짜 그렇게 말 한 것 처럼 따옴표를 친다.

    따옴표의 남용은 너무 빈번해서 차라리 따옴표를 제대로 쓴 기사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지경이다. 네이버 뉴스창에 올라오는 제목들을 보면 따옴표가 안붙은 제목이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은 따옴표를 지워도 의미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괜히 중요하게 보이기 위해서 붙여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이산 1세대" 노부부 "언제 가족들 만날지 답답" 이런 제목이 있다. 여기 들어간 두 쌍의 따옴표들이 없다고 해도, 즉 그냥 이산 1세대 노부부 언제 가족들 만날지 답답  이라고 적어도 의미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실 별로 잘 만든 제목은 아니다. 이산 이라는 말에 가족들과 헤어졌다는 의미가 이미 들어가있으므로 괜히 중복해서 쓸 필요가 없다. 또 이산가족이 가족을 그리워 한다는 내용 자체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좋은 제목을 잡기가 어렵다)

    이렇게 원래의 규칙과는 다른 곳에 따옴표를 남발하게 되면 따옴표의 진정한 의미, 즉 이 "  " 부호 안에는 실제로 말해진 멘트만 들어간다는 신성함이 퇴색되어 버리고 독자들은 따옴표가 나올 때 이것이 정말 이 사람이 한 말인지 아니면 기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가져다 붙인 말인지 혼란스러워 한다. 부적절한 따옴표의 사용으로 언론의 신뢰성을 언론 스스로가 깎아먹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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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국의 언론들은 취재원의 멘트를 멋대로 가공, 짜깁는 것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인촌 장관의 발언을 다룬 연합뉴스 기사를 보자. 소제목으로 "공직사회서 '종교편향' 확실히 정리할 것" 이라는 말을 따옴표를 이중으로 써가면서 적어놓았는데, 실제로 기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유인촌 장관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공직 사회에서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정리하겠다" 고 말했을 뿐 그 문장에서 "종교편향"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즉 유인촌 장관이 말한 "이런 일" 이라는 것이 "종교 편향"인지, 아니면 단순히 "오해를 살만한 사례"인지 (즉 진짜로 종교편향이 없도록 하겠다는게 아니라 그저 조용히 넘어가겠다는 이야기)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기자와 편집자가 멋대로 해석을 해서 따옴표를 붙여서 마치 장관이 공직사회에서 종교편향되는 일 자체를 없애겠다고 말한 것처럼 해 놓은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른바 "기사체"라는 문체이다. 이런 한글 기사는 어미와 조사의 사용마저 죽여버린다. 위의 유인촌 장관의 예에서도 생각해보자. 장관이 현장에서 기자들에게 딱딱한 반말조로 "확실하게 정리하겠다" 라고 말했을 리는 없다. 아마도 "확실하게 정리하겠습니다." 혹은 "확실하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도로 얘기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이 기사에서는 대뜸 반말투로 바꾸어놓았다.

    이것은 관례로 굳어져버렸지만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어미를 반말로 하느냐 존댓말로 하느냐, 조사는 어떤 조사를 쓰느냐, 어순은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그 느낌과 늬앙스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확실히 정리해야겠죠" 와 "확실하게 정리할께요", "확실히 정리해야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확실하게 정리하겠습니다" 는 각각 어감이 분명히 다르다. (뒤로 갈수록 그 의지가 강함)  그런데 대체 왜 이걸 그냥 다 "정리하겠다" 로 통일해버리는가. 기사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다. 

    따옴표로 따오는 멘트 (quote) 들은 자칫 밋밋하기 쉬운 기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그래서 영문 저널리즘에서는 "  " 안에는 반드시 화자가 말한 그대로 토씨 하나까지 똑같이 적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예외는 너무나 문법적으로 틀려서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리고 도저히 신문에 낼 수 없는 비속어를 사용했을 때 뿐이다. 그리고 만일 문장의 중간 부분을 생략했을 때에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 부분은 정말 재미있더군요 "  라는 식으로 말줄임표(......)를 사용해서 생략된 문장임을 반드시 표시해준다. 기자 멋대로 앞뒤중간을 잘라버리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서 써버리면 화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문장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몇몇 주간지나 월간지에서는 화자의 어투를 그대로 살려서 멘트를 따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4. 클리셰는 금물

    클리셰는 진부한 표현, 판에 박은 문구를 말한다.

    한번은 체육부에서 중국과의 농구시합 관련 기사를 써서 캐롤 부장에게 넘겼는데 그가 나를 부르더니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말했다. "If you mention the Great Wall again in any sports article regarding China, I swear I will kill you."  (너 중국에 관련된 스포츠 기사 쓰면서 만리장성 얘기 한 번만 더 하면 죽여버린다)

    "만리장성 넘어라" 라는 건 한국 언론에서는 밥먹듯이 쓰는 표현인데 나의 캐나다인 부장은 이게 정말 싫었던 것이다. 그의 표정은 정말 나를 죽이고 싶다는 혐오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만큼 클리셰라는 것이 영문 저널리즘에서는 금기시 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심지어 미국에는 어떤 기자가 클리셰를 많이 쓰는지, 어떤 매체가 많이 쓰는지를 추적하는 웹사이트까지 있다. (http://killthecliche.com/) 여기 나오는 기자들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글쟁이가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기자들은 기존에 존재해온 진부한 표현을 찾아 쓰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고 심지어는 자랑스럽고 편안하게 생각해왔다.

     

    중국과의 운동경기에는 "만리장성 넘어라" 

    한국인과 일본인의 만남에는 "현해탄을 넘은 사랑"

    중동지방을 언급할 때에는 "열사의 땅" 혹은 "중동의 모래바람을 잠재워라"  

    불교계는 "불심 달래기" 혹은 "불심 잡기" 

    영국인은 "영국 신사," 스페인은 "정열의 나라"  

    그밖에도 "도덕 불감증", "고충을 토로" "아줌마 투혼" "한류 열풍" 등이 대표적인 클리셰이다. 우리의 신문은 이런 클리셰들로 도배가 되어있다.

    사실 클리셰를 쓰면 안된다는 강제 규정은 없다. 다만 기사에 클리셰를 자주 쓴다는 것은 글을 써서 먹고사는 글장이의 입장에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소설가나 시인은 다른 사람이 쓴 문구를 베껴다가 작품을 내지는 않는다. 기자 역시 이야기로 먹고사는 이야기꾼이다. 글을 쓰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클리쉐는 피하고 나만의 표현, 독창적이고 귀에 쏙쏙 들어오고 머리에 오래 남아서 유행처럼 번질 수 있는 표현을 개발해야 한다. 만일 클리셰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면 다음을 생각하라.  "삼바 군단"이라는 클리셰를 처음으로 만들어내고 사용한 천재는 대체 누구였는지. 또  "열사의 땅"이라는 진부한 말은 과연 어떤 번뜩이는 머리에서 나온 말인지. 브라질-인도-중국-러시아를 일컫는 "BRICS" 라는 용어는 대체 어느 재치꾼이 생각해 낸 말인지. (2001년에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처음 썼다고 한다)  훌륭한 기자는 클리셰를 베껴쓰는 사람이 아니라 클리셰가 될 표현을 창조해내는 사람이다. 물론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 없으면 아예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을 말아야 한다.


    5. 레토릭을 줄이고 현실을 바라보라

    레토릭은 실질적인 의미는 없으면서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말이다. 레토릭의 대가는 외교관과 비즈니스 컨설턴트 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오~  뭔가 그럴듯 한데~"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좀 더 생각하면 "그래서 어쩌라구?" 라는 의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노하우로 승리하라  라는 경영관련 책에서 따온 구절이다. "탁월한 리더에게는 단순한 지능을 넘어서는 특별한 인지 능력이 있다.

    그러한 능력에는 개념적 수준에서 구체적 수준까지를 아우르는 폭넓은 고도 감각, 사물을 넓은 관점에서 살필 수 있는 광범위한 인지 범위,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파악하는 유연한 관점이 포함된다" 이 문장이 이해가 되는가? 뭔가 그럴듯한 말이 잔뜩 써 있는데, 결국 "리더가 되려면 폭넓게 생각해라" 는 13 글자를 길고 길고 아리송하게 늘여쓴 것에 불과하다.  컨설턴트라면 저렇게 별 것도 아닌 주제를 뜬구름 잡듯이 그럴듯하게 썰을 풀어야만 밥벌이가 되겠지만, 시민을 상대로 신문에 글을 쓰는 기자가 저렇게 쓴다면 그건 용서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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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에는 레토릭이 넘치고 넘친다. 747 정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매년 7% 경제성장, 국민소득 4만불, 세계 7대 강국을 줄여서 만든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이 747이다. 듣기엔 그럴싸하고 좋다. 비행기 기종인 747과 어울려서 기억하기도 좋다. 그런데 과연 이 공약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없다. 왜, 아예 858 혹은 636 이라고 하지 않는가? 

    정치인들이 저런 레토릭을 동원할 때 기자는 그걸 그대로 비판의식없이 받아써서는 안된다. 747이 대체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그게 대체 실현 가능성은 있는 얘기인지, 그걸 어떻게 추진하려고 구상하고 있는지 또 더 나아가서 왜 다른 대통령 후보들은 저런식의 무대포 공약을 내걸지 않는지에 대해서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정치인들의 레토릭은 끝도 없다. 이번 불교계의 반발이 있은 후에 이명박 대통령이 "유감 표명"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떴다. 그런데 대체 "유감 표명" 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우스울 따름이다. 우리 말 "유감"의 뜻은 원래 이렇다.


    유감 [遺憾]

    [명사]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

    즉 "나 너한테 유감있다"  "나 이번 일이 유감스럽다" 라고 하면 내가 남의 잘못 혹은 뭔가 외부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굉장히 불만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문기사에서 정치인들이 "유감표명"을 한다고 하면 영 다른 뜻으로 쓰인다. 즉 "뭔가 조금 미안하긴 한데 그렇다고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기는 싫은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영어의 sorry 혹은 regret 이란 단어를 번역하다보니 이런 말을 쓰게 된 것 같다. sorry나 regret 은 내 잘못이란 뜻으로 쓰일 수도 있고 단순히 상황이 안타깝다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기에 apologize 라는 말을 피하고 싶어하는 미국 정치인들이나 외교관들이 즐겨 쓰는데, 결국 이것들 역시 레토릭이다.

    이명박 대통령이던 어떤 정치인이던 "유감 표명"을 한다는 것은 사과도 아니고 뭐도 아니다. 다만 그냥 아무 의미없는 말 한마디 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자가 이걸 무슨 대단한 발표라도 하는 양, 호들갑을 떨면서 배경 설명이나 해석이나 비판없이 기사로 쓰는 것은 지면 낭비이며 인터넷 자원 낭비이다. 대통령이 "유감스럽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래서 어쩌겠다구요?" 반문해 보는 것이 기자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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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인들도 이렇건데 하물며 기자나 칼럼리스트가 스스로 레토릭에 빠져서는 안된다.

    한겨레 신문에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의 사임에 대해서 사설을 하나 썼다.(여기)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되어있다. "파키스탄의 집권 연정 역시 선거혁명과 거리시위를 통해 철권통치를 끝장낸 국민들의 민주회복 열망에 보답해야 한다. 식량과 전기 부족, 인플레 등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역시나 레토릭이다. "국민들의 민주회복 열망에 보답해야 한다"  "국민들을 더 외면해서는 안된다" 라는 말은 겉으로는 그럴싸 해 보이지만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어떠한 통찰력도 없는 텅 빈 문장이다. 어떻게 보답해야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국민을 외면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제안도 없다. 이렇게 레토릭으로 엉거주춤 끝나는 글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글 쓴 사람이 쓰고 있는 대상에 대해 잘 모를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6. 주제에 대해 공부를 해라

    준비가 덜 된 기자는 좋은 기사를 절대 쓸 수 없다. 제아무리 고종석, 김훈 같은 명문장가라도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쓰지는 못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서 억지로 글을 쓰면 티가 확 난다. 위에 예로 든 한겨레 사설이 바로 그렇다.

    흔히 연합뉴스나 뉴시스 같은 통신사들은 빨리빨리 속보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니 통신사 기자들은 깊이있는 기사는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국 통신사에서 일하는 기자들은 일반 신문이나 잡지 기자 못지 않게 철저히 준비하고 또 공부한다.

    블룸버그 통신에서 한국 IT 산업을 담당하는 친구가 일하는 걸 보면 철저한 준비에 고개가 절래절래 흔들어질 정도이다. 삼성전자나 SK 텔레콤 같은 대기업의 분기 실적발표가 있는 때이면 벌써 한 일주일 전부터 그 회사 사람들을 만나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예상치를 종합한다. 블룸버그 자체 단말기를 통해서 자료를 분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미국, 홍콩 등지의 여러 동료들과 의견을 수시로 교환한다. 회사의 네트워크를 이용한 전세계의 동종업계 기업들의 분위기 파악은 기본이다.

    발표 전날은 시험을 앞둔 수험생 같다. 실적이 나쁘게 나올지 좋게 나올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미리 다 세워놓고 1,000 단어가 넘는 기사의 상당부분을 미리 써놓는다. 그리고 당일 아침 일찍 발표회장에 자리를 잡아놓고, 공시가 뜨는 순간 1-2분 내에 기사를 완성해서 송고하는 것이다. 그럼 또 홍콩에서 자신도 공부를 충분히 해놓고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디터가 그 기사를 읽고 고칠 것 고치고 한 후에 다시 전세계의 블룸버그 단말기로 뿌린다. 결과물을 보면 분량이 길지만 기사가 어떤 흐름을 타고 있어서 마치 비즈니스 소설을 읽는 것처럼 지루하지 않다.


    같은 순간 한국의 통신사들은? 

    한국 기자들도 일찍 와서 자리를 맡아놓긴 한다. 공시가 뜨고 홍보팀에서 보도자료를 전송해주면 한번 읽어보고 중요하다 싶은 것을 첫문장(리드)으로 뽑아서 기사를 쓴다. 그리고 나머지는 홍보팀이 나눠준 보도자료에 있는 숫자들을 그냥 줄줄 나열해버린다. 당기 매출 3조, 영업이익 1조, 순이익 8천억, 전분기 대비 20% 상승, 전년 동기대비 15% 하락. 이어서 각 부문별로 반도체 총괄은 매출 1조 영업이익 5천억 순이익 3천억 전분기 대비 15%......  뭐 이런 식이다. 심지어 보도자료에 들어있는 테이블과 그래프를 그대로 그림판에 옮겨 붙인 후에 jpg 파일로 기사에 올려버리는 경우도 있다.  뭐가 중요한 수치인지, 이 발표가 시장에 던지는 의미와 화두는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력이나 분석은 서너시간 후에나 나온다. 그때까지는 독자들 스스로 알아서 건지세요... 하는 식이다. 그래봐야 최종 기사 분량은 블룸버그 기사의 절반도 채 안되고 내용은 특별히 관심없는 사람은 들여다 보기 싫을 정도로 글에 재미가 없고 무미건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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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기자회견이나 브리핑을 들어갔는데 주제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면 "누가 언제 어디서 뭐라고 했다"라는 식의 짧은 기사밖에는 쓸 수 없다. 요새는 인터넷 세상이라서 이런 식으로 기사써서 밥벌어 먹고 살기 쉽지 않다. 특히 사람을 인터뷰를 할 때는 철저한 준비는 필수일 뿐만 아니라 예의이다. 인기 가수의 인터뷰 자리를 어렵게 마련해서는 다짜고짜 "히트곡이 뭐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는 기자는 뺨 한 대 얻어맞어도 할 말이 없다. 한시간짜리 인터뷰를 위해서는 최소한 세 시간은 그 사람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해가야 한다.


    7. 기자는 형사가 아니다

    수습기자로 경찰서를 돌 적에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이다. 기자출신이나 언론 전문가는 아니시고 순수히 독자 입장에서 말씀하셨다.  형사는 취조를 하고 기자는 취재를 한다. 기자가 주제넘게 취재원을 윽박지르거나 깔보거나 협박하거나 부당한 조건으로 구슬려서는 안된다.

    미국이던 유럽이던 선진국에서는 기자는 굉장히 존경받는 직업이다. (물론 옐로페이퍼 빼고)  그쪽도 우리나라처럼 신문사에서 주는 보수는 박하지만, 돈과는 관계없이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 정의를 좇는 사람들이라는 직업관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기자라고 하면 안좋은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펜의 힘을 믿고 떵떵거리는 사람들. 야비하게 남의 약점을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 신문사 사주가 시키는 대로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들. 취재를 위해서라면 법도 무시하는 사람들. 잘난 것 없으면서 자기들이 잘나서 저 일 하는 줄 아는 사람들 등등. 불행히도 그런 비판들의 상당부분이 사실이기도 하다.

    좋은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되어라."  조선일보, 서울신문, MBC 등의 기자를 거치고 충북 청원군수까지 지낸 오효진 씨의 말이다.


    오효진씨의 경험은 이렇다.

    이 분이 수습기자로 경찰서를 출입하던 시절에는 선배들이 신입 기자들의 기를 살려주느라 경찰서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라고 가르쳤다. 건방지게 굴면 건방지게 굴수록 경찰서장이며 과장들이 설설 기는 모습을 보이니 젊은 기자들이 더욱 나쁜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뻘 되는 어른들과 반말지거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효진씨는 고등학교 교사로 4년간 일을 하다가 기자생활을 시작해서인지 그게 잘 되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서에 갈 때마다 정문 보초에게도 절을 꾸벅 하고 들어갔고 서장이나 과장은 아버지 대하듯이 공손히 대했다.

    그렇게 얼마쯤 하고나니 정문 보초도 오효진씨를 보면 피식 웃고, 형사계 반장도 빙그레 웃으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며 무시할 지경이 되었다. 자신을 고문관 취급하던 형사들이 반대로 반말을 하며 마구 대하는 애송이 기자들과는 담배를 나눠 피우며 친구처럼 함께 어울렸다. 그러니 그 기자들이 사건에 관해 형사들로부터 한마디라도 더 얻어듣게 되어서 오효진씨만 물을 먹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수록 더더욱 고문관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수사 과장실에 들어갔더니 동료 기자들이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치는 책상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걸터앉아 있었고, 다른 기자는 탁자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거기다가 한 젊은 기자는 수사과장의 불룩 나온 배를 툭툭 두드리며 "여보쇼 김 과장, 운동 좀 하쇼 운동! 뱃살을 빼서 빨리 진급해야 할거 아뇨. 이러니까 맨날 진급도 못 하지!"

    여기까지 나오자 고등학교 교사 출신 오효진 기자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야, 너희들은 아버지 어머니도 없어? 김 과장님한테도 우리만한 아들이 있을 거다. 아무리 우리가 기자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한 거 아냐!"  그리고 그 방을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경찰서장이 오효진 기자를 찾았다. 그날의 얘기를 들었는지, 둘은 점심 식탁에서 많은 얘기를 했다. 서로의 가정 얘기, 직장 문제, 진로에 관한 얘기 등. 수사과장 역시 "뭐 물어볼 거 있으면 엉뚱한 데 가서 헤매지 말고 나한테 전화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뒤부터는 일이 아주 쉽게 풀렸다. 무슨 사건만 터지면 수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술술 다 이야기를 해줬다. 먼저 그쪽에서 기사거리를 귀띔해주기도 했다. 소문이 퍼져서 정문의 보초도 오효진 기자가 절을 할 때 마다 요란하게 거수경례를 하며 구호를 외쳤고, 형사반장들도 빈정거림 대신에 벌떡 일어나서 반갑게 맞절을 했다. 이후 그의 초년병 기자 생활은 탄탄대로를 걷는 것과 같이 술술 풀렸다.

    이야기의 끝은 이렇다. 아주 오랜 후에 오효진씨가 언론사의 이사가 됐을 때, 역시 어떤 그룹사의 이사가 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네 얘기를 참 많이 하셨어. 시골에서 경찰서장을 하시다가 서울로 오셔서 수사과장을 하셨는데 그때 네가 그 경찰서에 출입했다더라. 언젠간 술은 잡숫고 오셔서 우시더라. 젊은 기자들이 버릇없이 구는데 네가 나무랐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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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되라는 건 기자 뿐 아니라 어떤 직업을 갖던지 간에 해당되는 이야기인지 모른다. 하지만 특히 기자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고 또 신문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있으므로 자기도 모르는 새 거만해지기 쉽다. 검사랑 얘기를 하다보면 꼭 내가 검사가 된 것 같고, 성공한 CEO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CEO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억지로라도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절제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회 저명인사들과 어울린다 해서 남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 아니다. 프로의식과 공정한 태도, 기본을 지키고 친분에 휩쓸리지 않는 취재, 사실과 의견을 확실히 구분하는 솔직함, 그리고 글장이로서의 자부심이 담긴 글솜씨를 갖고 독자를 계몽한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소임을 다함으로써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나라에서도 기자라는 직업이 독자로부터 진정 존경받는 날이, 또 국민소득 4만불이던 5만불이던 경제성장을 이끌어 갈 날이 올 것이다.

     

    [출처] 신문기자를 꿈꾸는 이들에게|작성자 indiz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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