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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과 노동자, 누구를 믿을 것인가 [테크 너머]지금 이곳에선 2025. 8. 10. 01:16
시스템과 노동자, 누구를 믿을 것인가 [테크 너머]
영국 우체국에서 회계 소프트웨어 오류로 수많은 노동자가 피해를 보았다. 한국에도 유사 사례가 있다. 사람보다 기술을 신뢰하는 풍조가 배경에 있다.
조경숙 (개발자·테크-페미 활동가)
입력 2025.08.09 08:24 호수 933

2024년 5월24일 영국 런던의 ‘우정국 사건’ 조사관 앞에서 전직 우체국 지점장들이 현수막을 들고 있다. ⓒEPA
지난해부터 업무용 시스템을 개발하곤 한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 업무 프로세스와 데이터를 꼼꼼하게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 시스템이 현장에서 제대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업무 프로세스를 담당자와 함께 짚어나가다 보면 늘 놀란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계셨어요?’ ‘이런 일들을 하고 계셨어요?’ 나뿐만 아니라 담당자도 당황한다. 자신이 이런 일을 이렇게나 많이 하고 있었다니,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시스템을 만들다 보면 때로 상대의 일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들곤 한다.
업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담당자와 개발자가 오래 소통하고 협업해야 한다. 실은 개발보다 기존 업무와 데이터를 샅샅이 파악하는 작업이 더 오래 걸린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도 만능인 건 아니다. 어떤 업무든 현실은 시시각각 변하고, 그 변화에 따라 알고리즘과 데이터 역시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를 가장 빠르게 감지하는 이들은 개발자가 아니라 현장 실무자다. 업무의 전체 흐름 속에서 데이터를 직접 다루는 실무자들은, 데이터의 방향을 가장 잘 아는 선장에 가깝다. 개발자는 그 선장의 지시에 따라 데이터가 원활하게 흐르도록 기술적 구현을 담당하는 조타수다. 즉, 개발자의 역할은 실무자의 판단을 기술 언어로 번역하고 시스템적으로 조율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시스템과 데이터가 현실보다 더 정확하다고 믿는다. 최근 외신에서 연달아 보도된 영국 우체국 스캔들은 기술에 대한 과신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국에서 일어난 우체국 스캔들은 일명 ‘호라이즌(horizon) 사건’이라 불린다. 호라이즌이라는 회계 소프트웨어로 인해 촉발되었기에 붙인 이름이다. 이 소프트웨어는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가장 심각한 건 실제 벌어들인 액수보다 더 많은 돈이 수입으로 기록되는 오류였다. 우체국장들은 시스템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영국 우정국 본사에 이를 보고했으나, 본사는 오히려 이들을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본사에서 데이터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니 어떤 우체국장들은 고발당하지 않기 위해 차액을 자신의 사비로 메우기도 했다. 그 금액이 어마어마해서, 어떤 이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카드 빚을 내거나 집을 팔아야 했다고 한다.
최근 발표된 영국의 공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5년까지 부당하게 기소된 이가 1000명이 넘는다.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더 많으리라 예측된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재정적 손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기소되고 수감되었다. 보고서에서는 무려 13명이 이로 인해 자살했다고 밝힌다. 본래 피해자는 700명 규모로 집계되었지만, 정식 실태조사가 진행된 이후에는 그 피해 규모가 더 큰 것으로 파악된다.

경기도 한 우체국 집배원이 할당된 물량을 배달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모습. ⓒ시사IN 신선영
집배원 46명이 사망했다
호라이즌 사건은 시스템을 과신하고 노동자를 불신하는 사회상을 보여준다. 영국 우정국 본사에서는 시스템이 보여주는 데이터가 가장 진정성 있는 기준이라고 여겼다.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많은 우체국장이 연달아 고발당하는데도 검사들은 별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왜 시스템의 잘못을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우정국 본사가 내민 호라이즌 시스템의 데이터만을 증거로 삼고 우체국장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사법부의 모습은 노동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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