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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밤, 택시운전사가 여의도에서 목격한 놀라운 광경지금 이곳에선 2024. 12. 18. 11:35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있다.(텔레비전 촬영)이정민
2024년 12월 3일 10시 40분경 손님을 태우고 송파에서 위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신호등에 걸린 잠깐 사이 습관처럼 운전대 왼쪽에 거치한 스마트폰으로 포털 뉴스를 열었다. 화면 상단에 빨간색 속보가 떴다.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전혀 현실감 없는 짧은 문장이 구름처럼 허공에 떠 있는 듯했다. 곧 신호가 바뀌고 차를 움직였다. 분명 현실감은 없었지만 뉴스가 거짓일 리는 없었다. 가슴이 차가워졌다. 우선 손님을 내려줘야 했다. 남은 거리는 짧았지만 도착시간은 하염없이 길게 느껴졌다.
아파트 입구에 손님을 내려주고 차를 길가에 세웠다. 거치대에서 스마트폰을 떼어 뉴스를 다시 확인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계엄이 선포되었다. 차가웠던 가슴에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옛날 계엄과는 다르리라는 희망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을 하고 민간인을 학살했던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 포고령으로 통제된 방송은 전라도 광주에서 무장한 폭도들이 시가지를 휩쓸고 이를 계엄군이 진압하는 중이라고 거짓 보도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본 바깥 세계는 군인과 경찰들로 살풍경했다.
저녁 늦게 집으로 온 대학생 형의 옷에서 나는 최루탄 냄새는 매캐했다. 어른들은 말을 아꼈고 우리들은 영문을 몰랐다. 계엄 하의 세상은 무서웠고 두려웠으며 어디를 가나 공포심이 팽배했다. 그 중심에 선 전두환이란 이름을 그때 처음 알았다.
44년 전 계엄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다시 계엄이라니. 그것도 2024년 서울에서. 비상계엄은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일을 팽개치고 양재동 집으로 차를 돌렸다. 중간쯤 가는데 전화가 왔다. 같은 동네 사는 처남이었다.
"매형. 어디예요? 어서 오세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당장 국회 가려고 누나들이랑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 했다. 이웃해 살면서 단짝처럼 지내는 처형과 아내도 분기탱천해 있을 걸 예상은 했지만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곧장 국회로 갈 채비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계엄은 곧 총칼을 든 군인인데 당장 국회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가족들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었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 계엄 하의 위험은 곧 생명과도 직결되는 죽고 사는 문제였다.
집 앞에 도착하니 벌써 채비를 다 마치고 처남과 처남댁, 아내와 처형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튜브에서는 국회 앞 상황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고 야당 지도자는 빨리 국회로 와달라고 호소했다. 시민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매형. 군에 있는 아들한테 전화했어요. 절대 시민들을 향해 총을 들지 말라고. 그런 명령이 내려오면 거부하라고 했어요. 부대 행정관한테도 전화했어요. 불법적인 계엄에 내 아들이 개입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말했어요."
공중파가 아니어도 폰에서 폰으로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국회 앞 숨 가쁜 현장과 군에 간 아들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세상과 소통시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당장 한 치 앞도 오리무중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옛날 계엄 때와는 다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탱크 대신 도로 위를 가득 채운 자동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밤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계엄군이 점령을 시도한 국회앞에서 시민들이 집결해 계엄해제를 요구하고 있다.권우성
빈차등을 끄고 가족들로 가득 찬 택시를 운전해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출발했다. 오후 11시가 넘었다. 정체가 완전히 사라진 올림픽도로를 달려 여의도로 들어가 국회 방향으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탱크도 장갑차도 아닌 시민들의 자동차가 도로 위에 가득했다. 처음 계엄 소식을 접했을 때의 차가워진 가슴에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연대의 힘이 불러온 광경이었다.
계엄은 마치 안개처럼 뿌려져 우리의 소소한 일상조차 감시하고 짓누르는 불의한 실체라는 걸 시민들은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시민들의 차량 행렬이 국회의사당을 향하고 있었다.
정체된 행렬에서 빠져나와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국회 앞으로 갔다. 한 손에는 폰을 든 채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국회의사당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착한 국회 앞에는 이미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대단한 열기였다.
계엄이 부른 공포를 사람들은 연대의 외침으로 물리치고 있었다. 불의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결기가 뜨거웠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의사당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화면으로 보였다. 본청 앞에서는 시민들과 계염군이 몸싸움을 하고 본청 안에서는 보좌관들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계엄군과 대치했다.
누군가의 선창에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따라 외쳤다. '계엄철폐 독재타도'. 1987년 6·10 항쟁 당시 대학 3학년이었다. 시민들과 한데 섞여 밤이 깊도록 거리를 달리며 외쳤던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였다. 당시 22살이던 내가 37년이 흘러 60살이 다 됐는데 쌍둥이 같은 구호를 길거리에서 외치고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인 자괴감으로 다가왔다.
다른 점이라면 최루탄이 없고 탱크도 착검을 한 군인도 없었다. 청바지 청재킷에 방독면을 쓴 채 시민들에게 곤봉을 휘두르던 백골단도 없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도 왠지 모르게 적어도 시민의 광장에서 피가 터지는 야만적인 폭력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절대로 아내와 처형과 처남댁을 차에 태우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에는 당연했던 것이 2024년에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불의는 같은 거였지만 시민사회는 분명 진보하고 진화해 있었다.
이제 와서 하나씩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그들의 치밀했던 쿠데타 준비는 실행 과정에서 좌절되었다. 그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국회의원들의 신속한 대응과 더 빠르게 대대적으로 운집해서 계엄군과 맞섰던 시민들에 의해 그리고 그런 시민들을 적으로 무찌를 수 없었던 양심적인 군인들에 의해.
12월 3일 밤 10시 29분 윤석열에 의해 선포되었던 비상계엄은 12월 4일 오전 1시 2분 국회의원 190명이 '계엄 해제 결의안'을 가결시키는 극적인 과정을 거쳐 해제되었다. 이후 군인들이 물러간다는 소식까지 들었지만 그래도 가시지 않는 불안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들 각자는 평일이면 늘상 해내야 할 각자의 일상과 몫이 있고 또 그것은 평온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이유도 다음 날 각자 감당해야 할 일들을 위해 잠을 자야 했기 때문이다.
돌아왔지만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계엄이 해제되었지만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대통령은 시퍼렇게 살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밤새 새로운 속보들이 분 단위로 이어지고 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이란 자의 광기 어린 욕망의 실체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불안은 오히려 가중되고 있었다.
일을 해야 했지만 일을 하지 못했다. 겨우 다음 날부터 운전대를 잡았다. 자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고 제 권력을 다지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은 대통령 놀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떳떳하고 당당해 보이는 윤석열, 어째서?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아이돌 및 프로야구 응원봉 등을 흔들며 국민의힘 의원들의 탄핵투표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이정민
그 주 토요일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의 정치권력이 우선인 국민의힘 의원들에 의해 탄핵이 부결되는 날도 나는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백만 시민 중 한 사람으로 서 있었다. 그날 나는 그 많은 인파들 중에 십 대 청소년과 이십 대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많다는 걸 알았고 다양한 응원봉의 존재도 처음 볼 수 있었다.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훨씬 많은 세대들은 평온하게 잘 짜인 자신들의 세계와 그 안에서 꿈꾸었던 미래까지 부정당하는 현장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37년 전 민중 항쟁의 한가운데 대학생들이 있었던 이유도 같은 것이었다. 계엄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야만적인 폭력이 지배했던 지난 시절이었다. 가열찬 운동권 노래, 짱돌과 화염병으로 상징되던 과거의 투쟁문화가 케이팝과 응원봉으로 대체되는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해서 포고문을 통해 알려진 윤석열의 쿠데타는 1980년 전두환의 것을 그대로 재현하려 했지만 2024년을 사는 시민과 군인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젠 모두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망상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진단한 선관위 (폐쇄형)서버를 조작한 부정선거 음모론이다. 계엄 실행 단계에서 대거 병력을 투입해 서버를 조사하려는 의도가 드러났다.
왜 선관위였는지를 의아해 했던 사람들은 윤석열이 극우 유투버들의 돈벌이로 전락한 부정선거 음모론을 철석 같이 믿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한편으로는 비웃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 술을 거의 매일 마시고 자주 격분하는)그가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걸 다들 알아챘기 때문이다.
탄핵이 부결된 후 백만 군중들의 귀가 전쟁 틈에 끼어 수 킬로미터를 피난민처럼 처량하게 걷고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탄 후에야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그날 나는 잘 마시지 못한 술을 한 병이나 마시고는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시 격량의 한 주가 지나서야 국회는 가까스로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군대를 동원해서 국회를 제압하고, 언론은 장악하고, 말 안 듣는 의사들은 처단하기 위해 대통령 자신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는 실패했다. 그래서 사형아니면 무기징역 또는 무기 금고외에 다른 형량은 없는 내란수괴죄로 기소되어 수사를 받아야 할 처지다.
하지만 그는 떳떳하고 당당하다. 전문가에게 조롱받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아직도 철석같이 믿고 있으며, 부정선거의 증거들이 낱낱이 밝혀지면 자신의 쿠테타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철딱서니 없는 망상에 빠져있는 듯하다.
윤석열은 관저에 칩거하며 경호처를 방패 삼아 검찰 특별수사본부와 공조수사본부의 출석요구조차 피하고 있다. 그가 믿는 또 하나의 방패는 탄핵안 가결을 염원하던 여의도 집회에 맞서 광화문 광장에서 집회를 했던 아스팔트 극우 단체다.
내란은 현재 진행형이고 탄핵은 아직 완결되지 못했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보수성향 단체인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대국본) 주최로 열린 '자유 대한민국 수호 국민혁명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탄핵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탄핵안 가결 며칠 전 손님 중에 70대로 보이는 노인분이 나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기사님은 이재명이에요 윤석열이에요?" 이럴 때 내 대답은 한결같다. "손님. 차 안에서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용하던 노인은 답답했는지 혼잣말을 했다. "이재명하고 민주당은 진짜 찢어 죽여야 돼. 부정선거로 당선되고도 저 지X을 하고 있으니..."
딸이 대신 호출해 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평범해 보이는 노인의 입에서 저런 증오의 단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쏟아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내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노인은 유튜브를 켰다.
탄핵안이 가결된 날 일을 하고 있었다. 신촌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광화문역을 거쳐 종로를 지나는데 양쪽 끝 차선으로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서 시끌벅적했다. 동화면세점 앞으로 가는 인도와 횡단보도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허리 굽은 노인들이 더 큰 깃발을 든 노인 뒤로 줄지어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이미 일대는 광장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욕설 섞인 주장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재명과 부정선거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5시 대통령 탄핵안은 재석의원 300명 중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3표, 무효8표로 가결되었다.
탄핵안 가결 후 윤석열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국민에게는 또 다른 선전포고이자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내리는 전투 지시와 다를 게 없었다. 내란은 현재 진행형이고 탄핵은 아직 완결되지 못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089473&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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