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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괜찮아 우리 인생 ‘딩동댕’…송해, 희망의 발자취문화 광장 2022. 6. 8. 14:16
이만하면 괜찮아 우리 인생 ‘딩동댕’…송해, 희망의 발자취
등록 :2022-06-08 12:14수정 :2022-06-08 12:47
김효실 기자 사진
1927년 출생, 1955년 데뷔해희극·진행·가수·연기 등 다방면 활약2003년 ‘평양노래자랑’ 최고의 기억으로 꼽기도
사람의집 제공
세 살 아이부터 백 살 노인까지, 절로 어깨춤을 추게 만들었던 사람, 일요일마다 “전국~노래자랑~♬”을 외치며 국민과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 8일 별세한 방송인 송해(95)의 이야기다. ‘최장수·최고령’으로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렀기에, 이별을 실감하기 쉽지 않다.
송해의 삶은 한국 현대사와 대중문화 발전사를 관통한다. 1927년 4월27일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송해는,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를 다니며 선전대 활동을 하던 중에 한국전쟁을 맞았다. 잠시 피난길에 올랐다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월남했다.
이때 ‘송해’라는 이름도 만들었다. 그는 88살이던 2014년, <힐링캠프>에 출연해 “본명은 송복희이며, 피난하던 부산행 배 위에서 이름을 바꿨다”고 밝혔다. “상륙함에 실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망망대해를 헤맬 때”, 바다 해(海) 자를 따왔다고 했다.
1955년 스무 아홉살 때 창공악극단에 입단하여 희극인의 삶, ‘딴따라’의 삶을 시작했다. 타고난 ‘끼’로 구봉서·서영춘·배삼룡 등과 함께 무대에서 활약한다. 동양방송(TBC)의 라디오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17년 동안 진행하며 사랑받았다. 문화방송(MBC) <싱글벙글쇼>는 이순주와 콤비를 이뤄 진행했다.
다큐 영화 <송해 1927> 스틸컷.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인간 송해, 그리고 아버지 송해는 이때 큰 고통을 겪었다. 아들이 22살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 큰 충격으로 생전 처음 라디오 방송을 펑크내기도 했다. <가로수를 누비며> 진행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가수의 꿈을 꿨고, 녹음테이프도 여럿 남겼다. 지난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에는 송해가 디지털로 복원한 아들의 노래를 듣는 모습이 담겨있다. “아, 잃어버린… 아, 네. 흔히 낭패를 당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만 봤지 내가 실감하지는 못했는데, 그런 느낌이 오더군요. 그런데 아들이 그랬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맨 먼저 생각한 건 걔가 하고 싶다고 한 걸 못 해준 게… 죄스러웠어요.”(영화에서 송해가 한 말)
한동안 모든 일을 쉬던 그를 다시 대중과 만나게 한 건 <전국노래자랑>이었다. 1988년 5월 <전국노래자랑> 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안인기가 송해를 찾아가 진행자를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시작하고 한 6개월 지났을 때 제가 또 급한 일이 생겨서 못 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시청자분들의 요청이 많고 해서 계속 맡아주면 안 되겠냐고 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영화 속 송해의 말)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국민들의 흥과 한, 삶의 희로애락을 나눴다.
송해는 2019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전국노래자랑>에 대해 “지역 갈등, 고부 갈등, 직업 간 갈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갈등, 성별과 세대 간 갈등이 <전국노래자랑>에서는 해소된다. 서로 손뼉을 쳐주고 용기를 얻는다”며 “이 프로그램은 ‘내 인생의 교과서’”라고 말했다. <전국노래자랑> 진행자로서, 지난 4월 말 기네스 세계기록 ‘최고령 티브이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부문에 등재되기도 했다. 1991년 건강 문제로 6개월 동안 진행을 쉬었던 기간 외에는 녹화를 빠진 적이 없다.
<전국노래자랑>은 남한을 넘어, 송해의 고향 이북에도 닿았다. 송해는 ‘인생 최고의 기억’으로 2003년 8월11일 모란봉 공원에서 연 <평양노래자랑>을 꼽았다. “‘그럼 이것으로 평양노래자랑을 여기서 전부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통일의 한길에서 다시 만납시다. 다시 만납시다!’하는데 관중들이 와!하고 함성을 내고 박수를 쳤어요. 아, 난 정말 지상 최대의 쇼를 했다, 그런 통쾌감을 느꼈습니다. (…) 그런 장면과 그런 기쁨을 아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이 감동을 보여주는 것이 제 소원이지요.”(책 <송해 1927>에서) 송해는 자신의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녹화 하는 일을 생전 소원으로 꼽아왔다.
다큐 영화 <송해 1927> 스틸컷.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원로’가 된 뒤 꾸준히 나이와 건강 이슈로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84살을 맞은 2011년에는 데뷔 56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독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에서 그는 10여 곡의 노래를 직접 불렀다. 올해 1월 한국방송이 설기획으로 방송한 트로트 뮤지컬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에서는 후배들과 함께 ‘내 인생 딩동댕’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송해는 “‘땡’과 ‘딩동댕’ 중에 뭐가 더 좋으냐고 하는데,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며, 희망의 메세지를 남겼다.
2018년 부인 석옥이씨와 사별한 송해는 부인의 고향인 대구 달성군에 함께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생전에 밝혀온 것으로 알려졌다. 달성군은 2016년 송해공원을 조성한 데 이어, 지난해 12월 공원 안에 송해기념관도 개관했다.
한국방송 제공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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