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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문기자 칼럼] “역사가 우릴 망쳐놨지만, 상관없다” 파친코... 흩어진 점들의 경이로움
    문화 광장 2022. 5. 11. 12:38

    [전문기자 칼럼] “역사가 우릴 망쳐놨지만, 상관없다” 파친코... 흩어진 점들의 경이로움

    입력 2022.05.11 07:00



    코리안 디아스포아라를 담은 애플TV+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가 뜨거운 갈채 속에 시즌1의 막을 내렸다. '파친코'는 두 개의 시간대(1910년대, 1980년대)와 세 개의 도시(부산, 오사카, 도쿄)를 마법 같은 편집으로 오갔다.
    폐품수집상의 아들로 태어나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 정치학 정교수가 된 강상중을 인터뷰로 만난 적이 있다.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의 베스트셀러로 한일 양국에 알려진 학자지만,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라는 출생이 사는 데 크나큰 족쇄였다고 했다.
    “재일동포 출신은 파친코나 고물상 등 선택지가 좁았어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용기를 내서 소니에 지원했는데, 가타부타 연락조차 없었죠. 취직 자체가 어려웠어요.”
    실어증까지 걸리며 자아분열을 겪던 그는, 독일 유학 시절 그와 비슷한 처지의 이민자 2세 임마누엘을 만나면서 ‘자이니치’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스스로를 상대화하여 복안의 시점으로 볼 수 있게 된 순간,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고. 그 순간 부유하던 나가노 데쓰오가 아닌 ‘고민하는 힘’을 지닌 강상중이라는 힘 있는 경계인이 탄생했다. 애플TV+의 ‘파친코’를 보면서 강상중을 생각했다. 국제적 역학과 차별이 제멋대로 망쳐놓아도, 결코 파괴되지 않는 인간의 단단함에 대해. 어딘가에 던져진 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이방인이라는 쓸쓸한 점들에 대해.
    그렇게 흩어졌던 점들이 서로 연결되고 섬광처럼 동시에 일어나는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2020년 비상한 기세로 미국 영화의 중심부로 진격한 봉준호의 ‘기생충’이 다양성의 포문을 열며 아카데미에 착륙했고, 이듬해 2021년 서부 개척사와 한인 이민사를 중첩한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가 싹을 틔웠다. 2022년 ‘미나리’의 산뜻한 기운이 한국과 일본과 미국 3개국 땅에 걸친 ‘파친코’ 가족의 거대한 파도로 이어졌다.
    굳이 선후와 인과를 연결 짓지 않더라도 우리는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중심과 변방,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가족과 개인의 ‘아우성’이 사려 깊게 버무려진 웅장한 다초점의 세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영화 '미나리'에서 '미나리 이즈 원더풀'이라는 놀라운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순자. 윤여정은 '순자' 역으로 세계 무대에 데뷔했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 흐름 속에서, 특별히 영화 ‘미나리’의 순자에서 드라마 ‘파친코’의 선자로 이어지는 윤여정의 움직임은 유유하고 아름답다. 아칸소 초원 바퀴 달린 집에 미나리 씨앗을 품고 나타났을 때부터 느껴지던 이 할머니의 자기다움의 활력이란!
    척박한 땅 불운한 일가에게 환영받지 못해도, 화사하게 제 몫을 찾아 ‘미나리 이즈 원더풀’이라는 놀라운 이중언어를 만들어낸 순자가, ‘파친코’의 선자로 넘어가, 가족이라는 운명 공동체의 씨줄과 날줄을 확장해가는 모습은 경이롭다.
    “내가 니 부모 될 자격을 얻어야 하는 기더라… 니도 얼라가 생기면 그럴 자격을 얻어야 된다. 선자 니는 할 수 있다이.” 어린 선자를 향한 부친의 말은 점들을 잇는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머나먼 타국으로 강제 이주되었거나, 더 나은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거나… 어떤 이유로든 국경을 넘어 기존의 공동체로부터 ‘수용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렸다. 터를 잡는 것은 누군가가 아량으로 자리를 내어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가 쓰고 다수의 한인 2세대가 각본, 프로듀싱, 연기, 연출 등의 창작자로 참여한 ‘파친코’의 여성들은 전쟁과 차별, 재난의 삼중고가 인간을 찢어버리는 1920년대 식민지의 시간대를 우직하고 현명하게 돌파한다. 어떻게든 ‘곁을 내어주고 손을 빌려주는 낮은 자들’의 힘을 빌려. 냄새 난다고 무시하는 시장 좌판에도 “여기 자리 있다”고 선자의 김치 리어카에 자리를 내주는 선한 이웃을 보여주며.
    “내가 선택한기라.”
    할머니를 원망하던 손자 솔로몬에게 늙은 선자가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내가 될 자격’을 얻기 위해 험난한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스스로 결정한 고생은 고생이 아니라고. 그렇게 주근깨 가득한 김민하의 꼿꼿한 얼굴과 연민으로 찰랑이는 윤여정의 검은 눈동자엔, 운전대를 잡고 자기만의 길을 유랑하던 영화 ‘노매드랜드’의 프란시스 맥도먼드도 어른거렸다.
    금융위기로 집을 잃고 ‘선구자’라고 이름 붙인 밴을 타고 미국을 떠돌던 주인공 펀(고사리라는 뜻으로 맥도먼드가 지은 이름)은 마트에서 만난 옛 제자에게 당당하게 설명한다. “나는 ‘homeless’가 아니라 ‘houseless’일 뿐”이라고.
    양지나 음지 아무 데서나 잡초처럼 잘 자라는 고사리와 미나리처럼, 이해받은 타인을 품은 채 지경을 넓히는 김민하, 윤여정,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빛나는 얼굴을 겹쳐본다.
    고향과 타향, 어느 곳에 있든 오직 자기 자신이 삶의 컨트롤키를 쥔 채로 당당했던 자의 얼굴. 자신도 타인도 함부로 판단해 보지 않은 편견 없는 자의 얼굴. 스스로를 기특해하고 타인을 애틋해하는, 결과적으로 역경과 유랑을 통해 독특하게 깊어진 나그네의 얼굴.
    “누구도, 누굴 함부로 할 순 없어. 그럴 권리는 아무도 없는 거란다. 그건 죄야.”-’파친코’의 선자
    “바퀴 달린 집이 어때서? 재밌다, 얘.”-’미나리’의 순자



    '파친코' 가족의 강인한 뿌리가 된 선자. 아시아와 소수자의 시선에서 ‘윤리와 크리에이티브’의 최적점을 찾아낸 애플TV+의 복안이 놀랍다.
    일본의 ‘데스노트’가 연상되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전 세계가 열광했을 때, 나는 드라마 세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한국이 빚과 혐오로 서로를 찌르는 ‘분홍빛 도살장’으로 은유 된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피냄새 진동하는 로컬 크리에이티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 3의 지대에서 품위있는 핏줄의 대서사시가 시작됐다.
    재미동포들이 사려 깊게 만들어낸 재일동포의 이야기, “역사가 우릴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하는 코리안 디아스포아라가 OTT 메인 스트림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가히 흩어진 점들의 꽃이다. 그렇게 조금씩 편견 없이 강인한 경계인들의 세상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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