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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허에서 맨주먹으로 일어선 나라… 존재 자체가 '희망의 등불'
    지금 이곳에선 2025. 6. 1. 03:41

    사회아무튼, 주말

    폐허에서 맨주먹으로 일어선 나라… 존재 자체가 '희망의 등불'

    [아무튼,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6·25 사진전' 20년

    안재철 WPF 대표의 항해기

    박돈규 기자

    입력 2025.05.31. 00:30업데이트 2025.05.31. 09:02

    20년 동안 ‘6·25 사진전’을 이어온 안재철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WPF)’ 대표가 지난 22일 서울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전시 중인 사진 한 장을 들고 서 있다. 1950년 11월 철저히 파괴된 서울 광화문 근처의 폐허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여인들과 아이들의 모습. 6·25 때 파병한 16국을 포함해 우리나라를 도운 67국의 국기도 함께 전시한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조국을 지키겠다며 총을 든 학도병들, 판자촌에서 철모를 물통으로 쓰며 빨래하는 여인들, 북한에서 미군을 따라나선 피란민들…. 서울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6·25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흑백사진들이 행인의 눈길을 붙잡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1년 365일 익숙한 풍경. 벌써 20년이 됐다.

    이 사진전의 긴 항해 이야기는 2001년 10월 미국 뉴저지주 바오로 수도원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은 평범한 사업가 안재철(69)씨. 그는 6·25전쟁 중 기적과 같은 일을 경험했다는 매리너스 수사(修士)의 장례미사에 참석했다가 큰 충격을 받는다. 1954년 가톨릭에 귀의하기 전 이름은 레너드 라루. 북한 피란민 1만4000명을 구출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다.

    1956년의 매리너스 수사. 가톨릭에 귀의하기 전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북한 피란민 1만4000명을 구출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이었다. /WPF

    “아내가 가자고 해서 따라나선 길이었습니다. 흥남철수작전과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인도주의적 구조 활동을 그날 처음 접했어요. 감동을 받았고, 부끄러웠습니다. 저처럼 잘 모르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6·25 때 희생된 유엔군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업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안씨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등을 뒤져 자료부터 모았다. 2005년 서울에서 ‘6·25 사진전’을 시작했다. 파병한 16국을 포함해 우리나라를 도운 67국의 국기도 함께 전시한다.

    20년 동안 부산·인천·수원·대전 등 여러 도시에서, 때로는 동시다발로 이 사진전을 열었다. 미국 워싱턴 DC, 버지니아 맥아더기념관, 하와이 등 해외에서도 사진전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명함에는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WPF)’ 대표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 22일 전시회 현장에서 만난 안재철 대표는 “낯선 땅에서 피를 흘린 청년들의 헌신을 기리며 빚을 갚고 싶었다”며 “대한민국의 번영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최빈국 국민이 노력하고 똘똘 뭉쳐 이룬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종종 망각하지만 세계에서 대한민국은 존재 자체가 희망의 등불입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북한 피란민 1만4000명을 구출했다. /WPF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22일 흥남항에서 피란민 1만4000명을 태우고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했다. 라루 선장은 그들이 모두 하선한 날 일기장에 “노아의 방주 이후 가장 독창적인 일 아닐까”라고 적었다.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만4005명 무사히 상륙.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하지요.

    “원산마저 중공군에 넘어가 퇴로가 끊겼고, 미군과 국군은 함포의 도움을 받아 바다로 탈출해야 했습니다. 군수 물자를 버리고, 전혀 모르는 적국의 피란민,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몰려든 사람들을 태웠지요. 저는 ‘흥남 생명 구출 작전’이라고 부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북한을 탈출해 거제도에 하선한 피란민들이 선원들에게 써준 감사의 글 /WPF

    -장례미사 얘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그 장례미사가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당시 한국으로 건축 자재를 수출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6·25에 대해선, 언제 터져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했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해 38선에서 싸우다 휴전했다는 정도만 알았던 거예요.”

    -메러디스 빅토리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6·25의 진짜 역사에 무지하다는 걸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웠고요. 제가 하나에 꽂히면 몰두하는 성격입니다.”

    -평생 이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나요?

    “아뇨. 누가 이런 걸 평생 합니까? 의협심이 강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안 했어요. 비영리단체를 설립해 라루 선장 추모비나 추모 공원을 만들겠다는 정도였습니다.”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한 세계 최고 기록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2004년에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구출한 1만4000명은 배 한 척으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기록이다’를 기네스북에 올렸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열광해서 후원할 줄 알았어요(웃음). 아니더군요. 2005년 거리 사진전을 시작하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 선원 로버트 러니를 초청해 체험담을 들려줬지만 언론이 WPF나 저를 주목하진 않았습니다.”

    -오기가 생겼나요?

    “자존심이 상해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죠. 더 넓고 깊게 알릴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흥남 철수로 시작해 장진호 전투를 들여다봤고 나중엔 6·25전쟁 전체를 파헤쳤지요. 2008년엔 ‘생명의 항해’를 출간했고요.”

    -절판된 그 책을 도서관에서 읽었는데 사진과 자료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기록했더군요.

    “확보한 사진은 5만장이 넘어요. 전부 고화질입니다. 오리지널 캡션, 즉 구체적 설명이 없는 사진은 한 장도 없어요. 국내에 돌아다니는 6·25 사진 중엔 엉뚱한 게 많거든요.”

    안재철 대표는 수 차례 해외 전시를 포함해 국내외에서 5500회라는 전시회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생업을 포기하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생명 구출과 휴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알리고,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어려운 나라에 희망과 비전을 주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6·25 사진전, 출항하다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터전을 닦았다는 안 대표는 생업을 접고 한국으로 건너와 이 일에 전념했다. 사진전 20년을 맞은 감회를 묻자 “이렇게 긴 항해가 될 줄은 몰랐다”며 “저희가 하는 6·25 교육으로 ‘실제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 나라를 지킨 게 기적이구나’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보람”이라고 답했다.

    -생업을 닫아도 될 만큼 집안 형편이 넉넉했나요.

    “그동안 6·25 자료 수집과 국내외 사진전, 출간 등에 300만달러(약 40억원)를 썼습니다. 컴퓨터 박사인 아내가 연봉을 많이 받아요. 염치 없지만 제가 생활비를 안 가져가도 집에서 쫓겨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인데 후원자가 있었습니까.

    “300만달러 중 절반은 후원이에요. 기업체나 은행에서 ‘취지에 공감한다’며 거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십시일반 도와주셨고요.”

    -역사를 알리는 방법으로 왜 하필 사진전을 선택했습니까.

    “저도 전후 세대지만, 요즘 청년들은 비주얼로 정보를 습득하잖아요. 사진이 글보다 직관적이고 호소력도 있습니다. 제가 자료를 수집할 때도 사진이 덜 지루했어요. 6·25 사진전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다 갔을 거예요. 부산역, 해운대, 속초, 주문진, 만리포…. 군부대, 학교, 교회에서도 했습니다. 상징적인 장소를 하나 꼽으라면 이곳이고요.”

    2010년 6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연 사진전 /WPF

    2010년 서울 용산 주한 미군 사령부에서 초대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장군의 동상 제막식과 함께 열린 6.25 사진전.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와 월터 샤프 주한 미군 사령관을 안재철 대표가 안내하고 있다.

    -여기 전시하는 사진들은 어떻게 선별했나요.

    “6·25전쟁을 스토리텔링으로 보여주는 구성입니다. 사진이 140점씩 10세트가 있었어요. 10곳에서 동시에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이곳은 장소가 넓지 않아 70점만 전시 중입니다. 그동안 불타거나 훼손되거나 도난당한 것도 많아요. 저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휴머니즘이 묻어나는 사진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주시죠.

    “(지난해 펴낸 ‘사진으로 보는 6·25 한국전쟁’ 표지를 가리키며) 짐을 멘 한국 아이 두 명의 손을 미군이 붙잡고 걷는 모습입니다. 철모의 십자가가 보이죠? 군목입니다. 강원도 홍천의 고향 마을로 아이들을 데려가는 길에 미 해병대가 촬영한 사진이에요. 부모는 돌아가셨습니다. 중1쯤 돼 보이는 아이가 하루아침에 가장이 된 거예요. 그때 대한민국이 딱 이런 처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전쟁 통에 아이들이 메고 있는 짐, 저 보잘것없는 살림이 앞으로 개선해야 할 운명처럼 보였어요. 이런 사람들이 역경을 딛고 맨주먹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거예요. 노력하고 뭉치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습니다.”

    안재철 대표가 지난해 펴낸 책 '사진으로 보는 6.25 한국전쟁'은 인류의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한 기록을 담고 있다."전쟁 통에 아이들이 메고 있는 짐, 저 보잘것없는 살림이 앞으로 개선해야 할 운명처럼 보였어요."

    험난한 파도를 넘어서

    안 대표는 2010년 기네스북에 기록을 하나 더 등재했다. ‘6·25전쟁에 세계 67국이 대한민국을 지원한 기록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연합군으로 지원한 세계기록’이라는 것. 그 전까지 우리는 파병 16국과 의무 지원 5국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기네스북 기록의 의미라면.

    “6·25 때 세계에 독립국은 91국뿐이었어요. 그런데 대한민국을 돕겠다고 67국이나 힘을 모은 겁니다. 공산국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인 셈인데, 범세계적 지원을 이끌어낸 건 요행이 아니에요. 국제 정세에 부응하면서 자유 수호 의지를 굳건히 지킨 지도자와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파병 16국에서 사진전을 여는 게 목표라고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저희가 큰 규모로 사진전을 진행한 곳은 미국과 태국뿐입니다.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에서는 요청하는 분들에게 사진만 빌려드려 전시했고요. 늘 돈이 문제입니다.”

    2015년 7월 미국 워싱턴 DC 링컨메모리얼에서 연 사진전 /WPF

    -파병국에서 전시를 할 때 반응은.

    “버지니아 노퍽의 맥아더기념관에는 해마다 가는데 미국 관람객이 더 감동합니다. 대공황을 겪고 어렵게 키운 청년들이 6·25에 참전했거든요. 우리 사진들을 본 젊은이들은 ‘미국이 이렇게 위대한 나라인 줄 몰랐다’며 놀랍니다. 여든이 넘은 퇴역 군인은 ‘미국이 도와준 나라가 많지만 이렇게 찾아와 감사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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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5/05/31/ITK6LCW2SBAM5HLAHKJXNVIQ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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