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보다 먼저 끌려 내려온 건 법관들이었다 [아침햇발지금 이곳에선 2025. 5. 12. 09:57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 재판에 참석해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용현 논설위원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 16세보다 먼저 권좌에서 끌려 내려온 건 법관들이었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에서 최고법원이었던 고등법원(parlement)은 혁명 발발 이듬해 바로 폐지됐다. 고등법원 판사들은 왕에게 돈을 내고 판사직을 얻어 세습했다. 재판 당사자들에게 뇌물을 받는 일이 횡행했고 각종 세금과 징집 면제 등 특권을 누렸다.
귀족이 아니었지만 또 하나의 특권계급이 된 이들은 ‘법복귀족’으로 불렸다. 평민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귀족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운 판결을 내렸다. 특권을 지키기 위해선 때로 왕과 대립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특권 유지를 위해 억압적 절대왕정을 수호했던 이들은 구체제의 상징과도 같았다.
국민제헌의회는 이들을 대체해 덕망있는 시민들을 판사로 임명하고 사법제도의 대대적 개혁에 나섰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프랑스 헌법과 사법제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프랑스 헌법에서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은 동등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사법부는 ‘권’(pouvoir)이 아닌 ‘기관’(autorité)으로 불릴 뿐이다. 3권이 아닌 2권 분립이다.
사법부는 행정권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대통령은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통해 재판의 독립은 보장되지만 법원 조직과 예산 등은 법무부에 속한다. 또 헌법재판을 담당하는 헌법위원회(제7장)가 사법부(제8장)보다 헌법에 먼저 규정된다. 우리 헌법과 반대다.
헌법위원은 대통령·상원의장·하원의장이 각 3명씩 임명한다. 대법원장도 헌법재판관 3명의 지명권을 갖는 우리와 다르다. 우리나라 대법원장은 대법관 임명제청권과 법관 인사권을 갖지만, 프랑스 헌법은 이 권한을 최고사법관회의에 부여한다. 최고사법관회의는 내부위원보다 외부위원이 더 많다.
대통령·상원의장·하원의장이 지명하는 이들이 외부위원으로 참여해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내부위원도 직급별 법관회의에서 선출한다. 이 모든 제도적 설계의 목적은 분명하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함부로 국민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 헌법은 이런 경계심을 풀고 사법권의 민주적 통제에 소홀했다. 그 결과 사법부는 국민과 괴리된 법복귀족이 됐고, 급기야 주권자 위에 군림하려는 반헌법적 괴물로 진화하기에 이르렀다.
조희대 대법원장과 9명의 대법관이 주권자의 민주적 권력창출 권한을 빼앗으려 한 지난 1일 대법원 판결은 그 민낯을 드러낸 장면이었다.
개인의 정치 성향을 넘어 국민의 명령에 따라 윤석열에게 전원일치 파면 선고를 내린 헌법재판관들과 달리, 10명의 대법관들은 최고법관이라는 신성한 직을 자신의 정치적 선호를 폭력적으로 관철시키는 데 남용했다. 뇌물을 받고 판결하는 것과 비교해 어느 게 더 타락한 법관인가. 게다가 조 대법원장은 명색이 3권 분립의 한 축이면서 대통령의 헌정 파괴 내란에 한마디 비판도 하지 않았다.
윤석열을 풀어준 지귀연 판사도 이런 대법원장과 암묵의 교감이 있지 않았느냐는 의심이 전혀 무리가 아니다. 국민을 억압하는 자들의 편에 서서 자신의 특권을 지키려 했던 앙시앵 레짐의 법관들과 다를 바 없다.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날림 판결’에 비판이 일자 대법원이 ‘기록을 다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해명했다는 사실이다.
이 후보 판결을 떠나, 재판 하나하나에 인생이 걸려 있는 수많은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일일이 기록을 보며 충실히 재판하는 게 어렵다면 대법관 수를 늘려야 할 텐데 대법원은 이것도 반대한다.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보다 소수 대법관의 알량한 특권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분야별로 민형사·노동·사회·행정·재정 등 5개의 대법원이 있고 이 중 민형사 대법원에만 100명 넘는 대법관이 있다.
프랑스 대법원도 독일과 비슷한 규모다. 이탈리아 대법관은 200명이 넘는다.
조희대와 지귀연으로 상징되는 이 시대 타락한 법관들이 생겨난 데는 민주적 장치가 턱없이 부족한 사법제도 탓이 크다.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처럼 사법부 인사에 의회 등 선출권력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다. 미국에선 법관을 선거로 뽑는 주가 많다.
일반 국민이 배심원이나 재판관으로서 재판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제도도 유럽·미국에 널리 존재한다. 독일에는 법관이 법을 왜곡해 부당한 판결을 내리면 처벌하는 법도 있다. 법관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도로써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부 독립은 그다음 차원의 문제다. 사법부 독립이 국민으로부터 독립해 제멋대로 판결할 특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검찰은 독립성이란 미명 아래 통제할 수 없는 괴물 권력기관이 됐다.
법원도 그 길을 걸어왔다. 검찰에 가려 희미했을 뿐이다. ‘근본 없는 권력’ 사법부는 독립을 말하기 전에 국민에 대한 두려움부터 가져야 한다. 조희대와 9명의 대법관, 지귀연 판사는 사법부에 어떤 권한을 어떻게 부여할지 주권자가 다시 결정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경종이 됐다. 그 사법개혁의 과정에서 법관들은 자신의 권한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원리를 체험으로 배우게 될 것이다.
'지금 이곳에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문수 "나도 내가 후보될줄 몰라…그렇게 이재명도 역전" (0) 2025.05.12 “정당사에 전무후무할 흑역사”…국힘 후보교체 불발이유 [송종호의 여쏙야쏙] (0) 2025.05.12 주문부터 출고까지 열흘... '테슬라 킬러' 키우는 中 전기차의 도시 (6) 2025.05.11 美, 관세 마구 휘두르다간 달러 패권에 위기 올 수도" (1) 2025.05.11 美 대통령 '1호 친구' 머스크 "트럼프는 옳다, 하지만 오락가락 관세는 문제다" (0) 202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