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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올림픽 개회식, 무언가 부족했다면 [비장의 무비]문화 광장 2024. 8. 18. 10:47
파리 올림픽 개회식, 무언가 부족했다면 [비장의 무비]
〈파리의 딜릴리〉
감독:미셸 오슬로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입력 2024.08.17 07:50 호수 882
부분적으로 볼만했지만 전체적으로 산만했던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 파리의 역사와 문화와 인물을 자랑하면서 포용과 관용, 성평등의 가치까지 담아내려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은 개회식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2019)가 이미 다 한 건데? 영화가 훨씬 더 잘했는데?
배경은 벨 에포크(Belle Époque).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활력이 넘치고 예술이 피어나던 ‘아름다운 시절’.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길(오언 윌슨)이 1920년대 파리를 동경하지만,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아르)는 정작 벨 에포크를 동경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시대의 파리다. 우리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시절의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어 하던 곳.
“딜릴리!” 이름을 부르자 얼른 채소 들고 뛰어나오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오순도순 식사를 준비하는 아프리카 어딘가의 부족처럼 보이지만 그때부터 줌아웃되는 화면 안으로 알록달록 차려입은 백인들의 뒷모습이 밀려 들어온다. 당시 실제로 있었다는 ‘인간 동물원’. 그곳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열 살 소녀 딜릴리.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청년 오렐에게 말한다.
“몇 달 동안 파리 사람들은 날 지켜보며 구경했어. 이제 내가 파리 사람들을 구경할 차례지.”
프랑스령 누벨칼레도니 카나키족과 프랑스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소녀 딜릴리가 이런저런 물건을 배달하는 청년 오렐의 자전거를 타고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피카소, 드가, 모네 같은 화가를 만나고, 물랭루주의 포스터를 그리는 툴루즈 로트렉과 파리의 상징 에펠탑을 지은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과 마주치며, 과학자 파스퇴르의 집에 들렀다가 마리 퀴리의 식탁에 앉는다.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의 유명한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사이 파리 곳곳에서 여자아이들이 계속 사라진다.
“여자들이 대학에 가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질서가 무너졌다”라고 믿는 악당이 여자아이들만 유괴해 검은 천을 뒤집어씌워 네 발로 기어다니게 만들고 있다. 그들을 구하고 싶은 딜릴리. 기꺼이 조력자가 되어주는 당대의 여성 셀럽들. 영화 〈파리의 딜릴리〉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키리쿠, 키리쿠〉 〈프린스 앤 프린세스〉 〈아주르와 아스마르〉 같은 작품을 만든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셸 오슬로 감독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도시 파리”를 무대로 정하면서 하필 벨 에포크 시대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여성에게 왕비나 공주, 요정의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바닥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게 했던 마지막 시대였다. 그러다 서서히 그 장벽이 무너진 시대이기도 했다. 첫 여성 변호사, 첫 여성 의사, 첫 여성 대학생, 첫 여성 대학교수… 이런 여성 영웅들의 활약 덕분에.”
‘아름다운 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는 진짜 이유를 〈파리의 딜릴리〉가 보여준다. ‘야만’에 눈감은 ‘낭만’은 기만이라는 걸, 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 증명한다. 수많은 관광 명소를 정교하게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파리의 어두운 하수도로 관객을 잡아끈 이유가 감독의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전쟁이나 테러로 죽는 사람보다 우리의 일상에서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여성의 수가 여전히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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