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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기로운 유럽 생활
    지금 이곳에선 2024. 6. 12. 10:23

    VOL.26|2024.06.10

    안녕하세요? 독자님
    유럽에서 날아온 스물여섯 번째 편지를 개봉해 주셔서 오늘도 감사합니다. ✈️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유럽에서는 관심이 그야말로 폭발적인 음악 경연 대회가 있습니다. 바로 '유로비전'(Eurovision Song Contest)인데요. 유로비전은 유럽을 중심으로 56개국에서 68개 회원사를 둔 유럽방송연합(EBU)이 주관하는 연례 대회입니다. 참가국은 자국을 대표할 1팀의 가수를 출전시키고 대회 기간 중 전세계에서 이뤄지는 투표를 통해 우승자가 가려집니다. '국가대표' 가수끼리 경연을 하는 것이니 참가자 수준도 상당히 높습니다.
    37개국이 참가한 올해 대회는 지난해 우승자를 배출한 스웨덴에서 지난달 7~11일 열렸습니다. 유로비전 기간이 되면 많은 이들이 무대가 열리는 현장을 찾는 것은 물론, 술집 등에서 함께 방송을 보며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곤 합니다.
    올해 우승자는 스위스에서 나왔는데요. '니모'(NEMO)라는 활동명을 가진 가수입니다. 니모의 우승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둘 다 아닌가요?
    (오늘은 '지금 여기, 유럽'과 '사람, 유럽' 두 코너를 병합해 진행합니다.)
    대체 얼마나 실력이 뛰어나길래 우승을 했는지 궁금한 분이 계실 것 같아 무대 영상을 담은 링크를 우선 첨부합니다. 몽환적인 선율, 이른바 '공기 반 소리 반' 창법이 귀를 사로잡습니다. 역동적인 퍼포먼스 또한 놓치기 아깝습니다.

     
    아무도 아니지만, 모두인 '나'
    '당신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둘 다 아닌가요?' 니모의 우승은 이런 질문을 남겼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이유는 니모가 스스로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 즉 '논바이너리'(non-binary)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로비전 역사상 논바이너리 가수가 1등을 한 것은 처음입니다. 그의 활동명인 '니모'는 그 자체로 제3의 성을 의미한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라틴어인 니모는 '아무도 아니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른 곡은 '더 코드'(the code).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 곡입니다. 주요 가사는 이렇습니다.
    쇼에 온 것을 환영해. 나는 게임을 끝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줘. 나는 사슬에서 벗어날 거야.
    Welcome to the show, let everybody know I'm done playing the game. I'll break out of the chains.
    나는 지옥에 갔다가 돌아왔어. 제대로 된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코드를 깨뜨렸어. 오아오오. 암모나이트처럼 시간을 좀 줬어. 이제 나는 천국을 찾았어. 난 코드를 깨뜨렸어. 오아오오.
    I, I went to Hell and back. To find myself on track I broke the code, whoa-oh-oh Like ammonites I just gave it some time. Now I found paradise. I broke the code, whoa-oh-oh
    니모의 우승 이후 '제3의 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3의 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처럼, 스위스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별만 존재합니다.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발급받을 때 남성 또는 여성, 둘 중 하나로 분류된다는 뜻입니다.
    독일 타게스샤우에 따르면 스위스 바젤녹색당 소속 시벨 아르슬란은 니모의 1등 이후 “스위스가 제3의 성을 공식 인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니모 본인도 스위스 정부에 '제3의 성을 인정하라'고 공식 요구했습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그는 유로비전 우승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제3의 성별은 입국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꿔야 합니다." 그는 우승 후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화할 것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스위스 법무부 장관이요!"
    스위스에서 제3의 성을 인정하자는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위스 연방의회는 2022년 보고서를 통해 '제3의 성'을 인정하는 데 공식적으로 반대한 바 있습니다. "사회가 아직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제반 노력이 매우 많이 들 것"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군 복무 등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반대 이유로 들었습니다. 니모의 유로비전 승리가 스위스에서 새로운 논의를 촉발시킬지 관심이 주목되는 이유입니다.
    사회적 구분에 속하지 않는 니모는 어쩌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스위스 언론에서 니모가 말한 것을 보면 말이죠. "부모님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코드에도 이런 가사가 들어있네요.
    나는 이제 자유를 찾았어. 나는 코드를 깨뜨렸어. 오아오오
    Now I found paradise. I broke the code, whoa-oh-oh, whoa-oh-o은
    성별? 답 안 하셔도 됩니다!
    주변국 상황은 어떨까요. 유럽에서도 국가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독일의 경우 제3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꽤나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입니다. 특정 사이트 또는 기관에 회원으로 등록할 때마다 이를 실감할 수 있는데요. 독일 집권당인 사회민주당(SPD)의 당원으로 가입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회원가입을 누르면 첫 화면에 이름과 성, 그리고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라는 화면이 뜹니다. 그리고 생일을 묻습니다. (아래 사진)

    그리고 성별을 묻는 질문이 나옵니다. 주어진 선택지는 이렇습니다.
    ①여성 ②남성 ③다양한 ④무기재(=성별 선택 거부).
    그러고보니 질문지도 특이합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과 함께 '당신은 무엇이라고 느낍니까?'라는 질문이 함께 등장합니다. (아래 사진)


    집권당이 특별히 개혁적이고 진보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홈페이지에 가입할 때도 비슷한 형식의 질문이 나오는 게 독일에서는 일반적입니다. 심지어 병원에서 정보를 적어낼 때 '제3의 성'을 체크하는 칸을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제3의 성에 대한 공감대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법적 기반이 존재했습니다. 2017년 11월 독일 헌법재판소는 '성별 기록 시 제3의 성을 적어 넣도록 허용하거나 성별 작성을 없애야 한다'는 판결을 낸 바 있습니다. 물론 제3의 성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법적 틀이 마련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유럽에서 제3의 성을 가장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 국가로는 아이슬란드가 꼽힙니다. 2019년부터 아이슬란드에서는 15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성별을 변경할 수 있고 중립적인 성별, 즉 제3의 성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독일 연방의회도 뒤를 이어 지난 4월 '만 14세가 되면 자신의 성을 남성, 여성, 다양한, 무기재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독일, 아이슬란드 등과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이는 국가도 있습니다. 영국인데요. 지난달 영국 BBC방송은 영국 정부가 학교에 '새로운 지침'을 내렸다면서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업데이트된 지침에 따르면 학교는 '성 정체성'의 개념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젠더가 스펙트럼이라는 견해를 포함하여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견해를 사실로 제시하는 교육 자료는 피해야 한다. 젠더에 관한 한 신중한 접근을 취하는 것이 옳다."
    제3의 성.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 몸이 말해요. 장기기증을 원한다고."
    독일에 젊은 영웅들(독일어로 Junge Helden)이라는 비영리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1년 전부터 '옵트 잉크'(Opt ink)라는 캠페인을 이끌고 있는데요. '잉크를 택하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이 캠페인에 대해 소개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들은 국민들에게 문신을 권합니다. 문신 모양은 똑같습니다. 두 개의 반원이 겹쳐져 있고 그 중 하나가 원에 걸쳐있는 형태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이 모양은 '반원이 또다른 반원과 만나 전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젊은 영웅들은 이것을 장기기증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장기가 다른 이와 만나 또 다른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젊은 영웅들이 옵트 잉크 캠페인을 시작한 건 장기기증 참여율이 현저히 낮은 상황과 연관이 돼있습니다. 독일장기이식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에서 장기기증에 참여한 사람은 965명이라고 합니다. 이식 대기자 명단에는 8,400명이 올라있는데 말입니다. 젊은 영웅들은 장기이식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서류상으로 이를 공식화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런 상황에서 사망했을 때 가족들은 사망자의 의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장기이식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문신을 새기면 사후에도 장기기증 의사를 알릴 수 있고 가족이 자신의 의사에 부합하는 선택을 내리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젊은 영웅들은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문신은 단순한 장기 기증 카드 그 이상입니다. 이는 명확한 의도 선언, 동의 증명 및 친족에 대한 명확한 진술입니다." 물론 공식 문서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실제 문신을 새기는 작업은 젊은 영웅들을 허브 삼아 이뤄집니다. 이 캠페인에 참여하고자 하는 타투이스트들이 등록을 하면, 문신을 새기기를 원하는 이가 자신이 원하는 타투이스트를 선택해 문신을 받는 형태입니다. 기본 형태에 디자인을 추가할 경우 추가 비용이 들 수 있지만, 타투는 기본적으로 무료입니다.
    젊은 영웅들에 따르면 약 700개 가량의 타투이스트(또는 업체)가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문신을 받은 이도 7,500명 가량이라고 합니다. 옵트 잉크 캠페인은 앞으로 더 흥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달 16일 독일 연방의회 의원들이 단체로 이 문신을 받으면서 화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독일 슈피겔에 따르면 국민들의 장기기증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캠페인에 참여했다는 사회민주당 소속 슈테판 슈바츠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문신이고, 아마 유일한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도 독자님들이 보내주신 소중한 의견과 함께 슬유생을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이번 주도 무탈하고 풍족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물가, 지자체 정책, 트렌드 등등)
    → 역시 소소한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죠.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
    💬 유럽 여러 나라 시니어들의 일상과 그들을 상대로 한 문화 또는 시설들이 궁금합니다~
    → 저와 비슷한 관심사를! 눈 크게 뜨고 살펴 보겠습니다.
    💬 동물성 제품을 전~혀 팔지 않는 초대형 마트의 새로운 실험이군요. 동네방네 자랑거리 맞네요 ㅎ
    → 매장에서 만난 손님들에게서 만족감이 뿜-뿜 느껴졌다면 기분 탓일까요. ㅎㅎ
    💬 Good living with you and me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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