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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 속 5.6㎞ 걷고 폐지값 2500원…늙고, 일하고, 가난하다지금 이곳에선 2022. 12. 15. 12:18
칼바람 속 5.6㎞ 걷고 폐지값 2500원…늙고, 일하고, 가난하다
등록 :2022-12-15 05:00
수정 :2022-12-15 10:48
이우연 기자 사진
서혜미 기자 사진
[르포] 폐짓값 폭락에도 멈추지 못하는 폐지 수집 노인들13일 오전 9시께 강할머니가 종이 상자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뜯고 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13일 아침 6시40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한 고물상 바닥에 매립된 대형저울은 강아무개(75)씨가 수레에 차곡차곡 모아온 폐지더미 무게를 35kg으로 측정했다. 요즘 폐지 kg당 가격은 50원이다. 그의 손에 1500원이 쥐어졌다. “이렇게 가격이 내려가면 하루 버는 게 확 줄어들어. 70원이나 80원만 해도 좀 나을 텐데.”
강씨는 아침 6시30분께면 집을 나선다. 집 근처 골목에 미리 모아둔 폐지‧플라스틱‧고철 등을 수레에 실은 뒤 700m 떨어진 고물상으로 향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집에 가서 점심을 먹은 뒤 쉬다가 다시 동네를 돌며 폐지 등을 수집한다. 이튿날 아침이면 다시 고물상으로 가져간다.
이렇게 하루 7~8차례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고물상을 오간지 3년 정도 됐다. 하루에 만원 좀 넘게 번다. 한달 동안 50만원 남짓 벌어 생활비와 손자들 용돈으로 쓴다고 했다.
이날은 새벽 내내 내리던 눈이 막 그쳤다. 강씨는 저 멀리 폐지가 보이면 잰걸음으로 가서 얼른 챙겼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차량이 오는지 잘 살피지 않고 건너기도 했다.
3시간 동안 폐지를 주우며 고물상을 4번 들렀다. 지도앱으로 확인해보니 5.6km, 8500보가량 걸었다.
기자가 동행한 이날 대박이 터졌다. 오전 동안 강씨는 ‘무려’ 3만3470원을 벌었다. 55kg에 달하는 폐지로 받은 돈은 겨우 2500원이었다. 그럼에도 3만원 넘게 벌었던 것은 누군가 kg당 670원을 쳐주는 옷가지를 잔뜩 내놨기 때문이다. 강씨는 “내 역사상 제일 많이 받았다”며 활짝 웃어 보였다.
폐지 가격이 급락한 요즘에는 폐지 20kg 이상을 모아 고물상을 6~7차례 찾아가야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쥘 수 있다. 강씨는 “오늘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아침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한 골목에서 강아무개(75)씨가 폐지를 주워 리어카에 싣고 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강씨같은 폐지 줍는 노인들과 폐지를 사들이는 고물상 사장들은 폐짓값 폭락 한파를 통과 중이다. 세계 경제 불황으로 종이 수요가 줄면서 폐지 가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이 폐지 수입을 축소해 ‘폐지 대란’이 일었던 2020년 3∼4월 폐지 압축장이 매입하는 폐지(골판지) 가격은 ㎏당 55.6원으로 떨어졌다.
이후 조금씩 가격이 회복되며 1년 전인 지난해 12월에는 3배 가까이 오른 152.5원으로 최고치를 찍었다. 그러더니 다시 가격이 떨어져 지난 달에는 ㎏당 84원으로 1년 만에 반토막이 났다. 이달 기준 서울시내 고물상이 매입하는 폐지 가격은 여기서 더 떨어진 kg당 40∼50원인 것으로 파악된다.
폐지 수집 노인에서 고물상, 압축장, 제지 공장으로 이어지는 폐지 흐름에도 비상이 걸렸다.
수요가 줄어 공장에도, 압축장에도 폐지가 쌓여가고 있다. 환경부 자료를 보면, 제지 공장 폐지 재고는 지난해 평균 10만1000톤이었으나 올해 6월 19만2000톤까지 상승했다. 다급해진 환경부가 10월에 이들 폐지를 공공비축창고로 이동시켜 현장 재고는 14만4000톤까지 일단 줄여 놓은 상태지만 불안불안한 상황이다.
서울 영등포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김상태(46)씨는 “업계에서는 향후 1년간 폐짓값 하락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폐지가 쌓여) 고물상에서 폐지를 못 받는 정도가 되면 끝이다. 여의도 빌딩에 수거하지 않은 폐지가 쌓이는 폐지 대란이 올 수 있다”고 했다. 영등포 한 고물상에서 일하고 있던 송하용(72)씨도 “보통 폐지 수집 노인들은 고물상이나 동사무소(주민센터)에서 리어카를 대여받는다.
한때 폐짓값이 100원까지 올랐을 때는 전동 핸드카를 사서 폐지를 줍는 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랬던 폐짓값이 반토막나자 동네마다 보이던 폐지 수집 노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 마포구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이아무개(55)씨는 “코로나 발생 후 폐지 수집하는 어르신이 반절이 줄었고, 지금처럼 폐짓값이 떨어지니 3분의1로 또 줄었다”고 했다.
폐지 수집 노동시장에는 강씨처럼 다른 수입원 없이 온종일 폐지 수집 노동에만 전념하는 노인, 공공일자리에 참여하거나 수급을 받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노인들이 있다. 대부분 저학력에 혼자 살거나 부양 가족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아픈 몸을 이끌고도 폐지 수집 노동을 멈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12일 서울 영등포의 한 고물상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리어카에서 꺼내고 있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지난 11일 영등포 양평동 고물상에서 미리 모아둔 폐지와 이날 2시간 남짓 모은 폐지 45kg를 팔아 2300원을 번 양아무개(80)씨는 한달 27만원을 받는 초등학교 급식도우미(공익형 일자리)를 하면서 주말에는 폐지 수집을 병행하고 있다.
혼자 산다는 양씨는 “집에 있으면 누워 있기만 하고 답답해 약값 벌려고 파지를 줍고 있다. 허리가 아파서 쉬다가 지난달부터 다시 시작했는데 파짓값이 반토막이 돼있더라”고 말했다.
폐지 40kg를 넘기고 2000원을 받은 구자갑(86)씨는 “원래 학교에서 급식 도우미를 했는데 다쳐서 골반을 수술하고 나서 이 일만 하고 있다.
늙은이가 돈 벌게 뭐가 있나. 한푼이라도 벌어보려고 하는데 너무 싸서 애먹고 있다”고 했다. 구씨 옆에서 얘기를 듣던 86살 노인은 “몇달 전 새벽에 폐지 실은 리어카에 깔려 기절한 뒤 가슴에 철심 박는 수술을 했는데, 기초연금과 수급비로는 암 걸린 아들을 건사할 수 없어 이 일을 그만 두지 못한다”고 했다.저임금, 위험노동, 변동 큰 폐짓값까지. 노인 빈곤의 단면을 매일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이들이 칼바람 부는 골목마다 굽은 허리를 숙인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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