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단칸방서 8개월째 반신불수 생활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지난달 27일 서울시 천호동에 있는 한 허름한 단독주택 지하방.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 짜리인 이 좁은 방에는 선풍기조차 없어 앉아만 있어도 등줄기로 땀방울이 흘렀다.
1년 전 허리를 다쳐 반신불수가 된 올해 75세의 이나미 할머니는 이곳에서 딸과 함께 8개월째 생활해오고 있다. 할머니는 1천만원의 수술비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신세였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1907-42). 이 할머니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가산 이효석의 장녀이자 '이효석 전집'을 두 번이나 출간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1942년 평양에서 부친이 사망하기 전 아버지의 집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이효석 문학의 산 증인이다.
특히 1983년 국내 외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효석 작품들을 처음으로 정리, '이효석 전집'(전8권)으로 발간하며 '이효석'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이날 이 할머니는 기자에게 눈물로 점철된 자신의 삶과 죽어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부모의 기구한 운명을 3시간에 걸쳐 구구절절하게 풀어놓았다.
"1941년 모친이 돌아가시고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아버님의 연세가 34살, 저는 11살이었지요. 여동생과 남동생은 친할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갔지만 저는 평양에 있는 외삼촌 댁에서 지내야했어요. 그러나 외삼촌댁 사정도 여의치 않아 1949년 겨울 아버님의 절친한 친구셨던 유진오 선생님을 찾아 혼자서 월남했지요."
그러나 월남 이후의 삶 역시 눈물의 연속이었다. 6명의 처자식이 딸린 유진오(1906-1987.당시 고려대 교수)씨 댁에서, 먼 외가 친척 댁에서 '더부살이'를 해야했다. 1950년 결혼식을 올린 지 2주도 채 되지않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피난을 가야했다.
할머니가 부친의 전집을 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던 1970년 대 말의 일.
"1979년의 일이었던 것 같아요. 한번은 아버지가 헐렁한 셔츠 차림으로 꿈에 나타나 수북이 쌓인 원고 뭉치를 가리키며 자꾸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꿈 이야기를 유진오 교수님께 했더니 '그럼 한번 해보자'며 용기를 주셨지요."
이 할머니는 전국 도서관, 개인수집가, 서지학자 등을 찾아다니며 뿔뿔이 흩어져있던 부친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작품 하나에 20만-30만원씩 주고 산 것도 적지 않았고 부친 제자들이 일본에서 구해온 것도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한모(1923-1991) 당시 서울대 교수와 서울대 대학원생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마침내 총 8권으로 된 '이효석 전집'이 1983년 겨울 이 할머니가 설립한 '창미사'(☎02-742-7497)라는 출판사를 통해 출간됐다. '도시와 유령' 등의 중단편, '벽공무한' 등의 장편, 수필을 비롯해 이효석의 제자들이 스승을 회고한 글들이 수록된 이 전집은 국내 이효석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효석 연구가 급진전하게 된 계기로 꼽힌다.
이 할머니의 '부친 알리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3년에는 장편 '푸른탑', 수필 '산협의 시' 등 이효석 생존시에는 발표됐으나 망실돼 묻혀있던 작품들을 새로 발굴해 제2차 전집을 발간했다.
그에게 가장 한스러운 기억이 있다면 부모님 유골을 두 번이나 이장해야 했던 일이다.
이 할머니에 따르면 1942년 부친사망 후 몇해 뒤 친할아버지는 부친 고향인 강원도 진부에 모친의 유골과 합장했다. 그러나 1972년 봄 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한 이장통고를 받고는 부득이하게 장평으로 이장해야했다.
정부가 지정해준 장평의 이장 장소는 남의 문중 땅이었다. 더구나 또다시 고속도로 부지로 지정되는 바람에 이 할머니는 1998년 눈물을 삼켜가며 부모님 유골을 재이장해야했다. 현재 이효석 묘소는 파주 경모공원에 위치해 있다.
이 할머니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강원도 사람들은 이효석이라는 작가가 누군지 조차 제대로 몰랐다"면서 "아버님의 이름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원래 부유하지 못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태로 전집을 두 번이나 발간했으니 가세가 기울만도 했을 듯 싶다. 이렇게까지 빈곤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에 대해 이 할머니는 "남편이 사업에 실패했다"는 말 외에는 구체적인 언급을 꺼렸다.
현행 저작권법에 따르면 1957년 이전 사망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의 경우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이 할머니는 부친의 작품으로 인한 인세 수입도 전혀 없는 상황이다.
이 할머니는 "다시 태어나도 작가가 되겠다던 아버님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이뤄드렸다고 생각해요"라면서 "조만간 '이효석 전집' 수정증보판을 찍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치료받을 돈은 없어도 부친을 빛내는 전집 발간 사업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2003년 발간한 전집 200질은 집 안 구석에 아직도 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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