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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아, 네가 살아서 너무 기뻐”… 아빠는 하늘에서 웃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선 2024. 1. 2. 11:11

    “딸아, 네가 살아서 너무 기뻐”… 아빠는 하늘에서 웃을 것이다

    딸 구하고 떠난 아빠를 추모하며… ‘딸 셋 아빠’ 정용준 소설가 기고

    정용준 소설가

    입력 2024.01.02. 03:00업데이트 2024.01.02. 06:21

    살기 위해 애쓰는 건 생각과 의지가 아닌 본능이다. 날아오는 공을 순간적으로 피하는 것 같은. 생존에 직결된 방어 행동은 대뇌의 관여 없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본능적으로 삶을 원하는 것이다. 계속 살기를.

     

    2022년 한 해 4만113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2323명이 다쳤고 317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많은 화재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이 두렵고 아득하다. 하지만 실감나진 않는다. 숫자와 통계는 일시적으로 충격을 줄 뿐 사건에 담긴 사연과 사람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12월 25일 도봉구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20명 넘는 사람들이 다치고 2명이 사망했다. 사건은 하나지만 슬픔은 하나가 아니다. 거룩하고 고요한 그 밤에 비극적인 사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중 한 가족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열심히 살아온 젊은 남녀가 있다. 남자는 서른두 살 약사, 여자는 서른세 살 간호사다. 둘은 가족을 이루고 두 딸을 선물로 받았다. 첫째는 두 살, 둘째는 7개월. 정신없이 살아야 했을 것이다. 육아하고 일하고, 집 구하기 위해 대출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저녁 때 한자리에 모이면 함께 밥 먹고 예쁘게 나온 사진을 고르고, 고단한 눈을 감을 땐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딸들이 커가는 모습과 웃는 얼굴을 보면 기이한 힘이 솟았을 것이다.

    ‘이래서 내가 사는 거지.’ ‘그래서 힘들지만 돈을 버는 거지.’ 애쓰며 사는 보람도 느꼈을 것이다. 마침 크리스마스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부부는 서로 수고의 말을 건네고 사랑의 인사를 나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달콤한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두 딸과 함께 다정하게 사진도 찍는다. 대단한 이벤트나 드라마틱한 하루는 없었지만 부부는 소소하고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다. 두 딸을 품에 안고 이내 잠에 빠져든다.

    깊은 새벽 아래층에서 시작된 불이 순식간에 부부의 집을 삼켰다. 현관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갈 수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불길이다. 부부는 불을 등지고 두 딸과 함께 창가에 섰다. 맨몸으로 4층에서 뛰어내려 무사할 순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본능적으로 뛰어내렸다. 살아야 했다. 경우의 수를 따지고 무사할 확률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아내는 큰 부상을 입었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두 딸은 무사했다. 남편은 경비원들이 가져온 재활용 포대 위로 첫째를 던졌고, 둘째 딸은 품에 안고 뛰어내렸다.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딸은 살았지만 아빠는 죽었다는 사실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상에 슬픈 일은 너무 많이 일어나지 않는가. 지금의 뉴스는 다음의 뉴스로 바뀌고 오늘의 소식은 내일의 소식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하지만 아빠의 죽음은 마음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아빠 품에 안긴 딸은 살았지만 박씨는 바닥에 부딪히며 머리를 크게 다쳐 결국 숨졌다.’

    아파트 4층에서 떨어지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떤 자세로 떨어져야 품에 안은 딸은 무사하고 아빠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게 되는 걸까. 마음이 저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실제로 통증을 느껴 손으로 명치를 꾹 눌러야 했다.

    4층에서 뛰어내린 이유는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살려야 한다’였다. 불을 피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단순히 생존 본능으로 설명한 것이 부끄럽다. 그보다 더 큰 본능과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숭고하다’,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행동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도 세 딸을 키우는 아빠. 같은 상황을 가정해본다. 딸을 품에 안고 뛰어내리자. 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혹 내가 죽더라도. 나는 깨달았다. 아빠는 대뇌로 판단한 게 아니다. 그건 본능이었다.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살려야 한다는 본능.

    어려운 날들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전망을 내놓는다. 결혼과 출생은 점점 줄어든다. 가족이 무너지고 마침내 사회도 무너질 것이다. 취업이 어렵다. 고용은 불안하고 경제 기반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집을 구할 수 없다. 생태계는 파괴되고 기후 위기로 이상한 날씨가 이어진다. 아이를 낳는 것도 어렵고, 낳는다 해도 제대로 키우기도 어렵다.

    뉴스만 보면 사회가 곧 무너질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은 사람을 만난다. 사랑을 느끼고 가족을 이룬다.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험난한 육아를 온몸으로 이겨낸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가족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시대에서도 어떤 가족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아빠는 아이를 살리고 죽음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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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건은 곧 잊힐 것이다. 이상하고 슬픈 일은 계속 일어나니까. 오늘의 사건이 주는 충격과 자극이 어제의 사건을 희미하게 희석할 것이다. 하지만 아빠가 딸을 구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이 사실은 그 가족에겐 영원한 이야기로 살아남는다.

    그 이야기가 남편을 잃은 아내에게, 아빠를 잃은 두 딸에게, 영원히 기억된다. 나는 확신한다. 이야기의 힘으로 가족들의 미래는 지켜질 것이라고. 아빠는 세상에 없지만 아빠의 희생은 창창하게 열린 딸들의 남은 날을 함께하며 보호할 것이라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두 딸의 안녕을 위해 기도한다.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을 아내의 오늘과 내일을 염려한다. 세상이 진창에 처박힌 폐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온갖 범죄와 비정한 사람들의 소문과 소식에 이 땅에 더는 사랑과 온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살아남은 가족을 위해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러주고 말 없이 손을 잡아주며 함께 울고 위로해주는 이웃과 친구와 동료들이 있다. 분명히 있다.

    정말로 영혼이 있다면,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가족들을 지켜보는 마음과 정신이 있다면, 그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지금 슬프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만 같다.

    ‘그건 잘 모르겠고 딸이 살아서 너무 기쁩니다.’

    정용준 소설가

    아래층 불에, 딸 안고 뛰어내린 아빠 끝내…

    서울 도봉구 아파트 새벽 화재

    양승수 기자

    서보범 기자

    박혜연 기자

    입력 2023.12.26. 03:11

    성탄절인 25일 새벽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주민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사진은 이 아파트 3층에서 발생한 불과 검은 연기가 아파트 위층으로 치솟는 모습. /서울소방재난본부

    성탄절인 25일 새벽 서울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30대 남성 둘이 사망하고 주민 30명이 부상했다. 숨진 남성 중 한 명은 불길을 피하려고 7개월 된 아이를 안고 아파트 4층에서 뛰어내렸다. 아이는 살았지만 아버지는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옥상으로 대피하다 11층 비상계단에서 발견된 다른 사망자는 불이 나자 가족을 모두 대피시킨 뒤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고 한다. 이 사람의 70대 부모와 동생은 살아남았다.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새벽 4시 57분쯤 서울 도봉구 방학동 23층짜리 아파트 3층의 한 집 작은 방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집에 살던 70대 부부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불은 바로 위층으로 빠르게 번졌다. 4층에는 30대 부부가 각각 두 살, 7개월 된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거센 불길이 올라오자 아내 정모(33)씨는 경비원들이 대피를 도우려고 바닥에 갖다 놓은 재활용 포대에 두 살 딸을 던진 뒤 자신도 뛰어내렸다. 아이는 재활용 포대 위에 있던 경비원이 받았다고 한다. 이어 남편 박모(32)씨가 7개월 아이를 이불로 감싸 안은 뒤 재활용 포대 위가 아닌 딱딱한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아파트 관계자는 “4층이 불길에 휩싸인 급박한 상황이었다”며 “아내가 있던 포대 위 자리가 부족해 남편은 맨 바닥에 뛰어내렸다”고 전했다. 그는 “박씨가 떨어진 뒤 아이가 박씨의 품에서 튕겨져 나왔다”고도 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박씨는 현장에서 숨졌지만, 아내 정씨와 두 딸은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그래픽=박상훈

    소방은 사건 발생 5분 뒤인 새벽 5시 2분에 도착했다. 소방서 관계자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불길이 상당히 컸다”며 “박씨 부부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경비원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사망자 임모(37)씨는 아파트 11층 계단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10층에 살던 임씨가 불길을 피해 옥상 쪽으로 올라가려다가 연기에 질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임씨의 아버지는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을 다 살리고 네가 죽으면 뭐 하나”라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나”라고 했다.

    25일 오전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아파트 화재 현장 외벽은 까맣게 불타 있었다. 아파트 3층부터 17층까지 그을린 자국이 보였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날 화재 최초 신고자는 ‘아파트 10층 주민’이라고 밝힌 사망자 임씨였다. “아래에서 연기가 올라온다”고 신고한 임씨는 11층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파트 3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아파트 6~7층까지 태웠다. 유독가스는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을 통해 아파트 최상층인 23층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 주민들은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만큼 불이 빠른 속도로 번졌다”고 했다. 주민 A(58)씨는 “5시 10분쯤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는 방송을 듣고 잠에서 깼다”며 “남편과 함께 대피하려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열기와 유독가스가 들어와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A씨는 “도저히 밖으로 나갈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해 집에서 수건에 물을 묻혀 입과 코를 막고 베란다에서 구조를 기다렸다”고 했다.

    9층에 사는 주민 김모(51)씨는 “새벽에 ‘불이야’라는 소리를 듣고 바깥을 보니 소방차가 여러 대 와 있었다”며 “바깥으로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베란다에서 아내와 함께 구조를 기다렸다”고 했다. 21층에 사는 한 주민은 검은 재로 덮인 자전거를 닦으며 “안내 방송을 듣고 문을 열었더니 뜨거운 열기가 확 들어차서 ‘나가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집에 머물렀다”고 했다.

    아파트 관계자는 “갑자기 ‘빵’ 하고 가스 폭발음 같은 터지는 소리가 난 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며 “현장에 도착해 보니 3층에서 불꽃이 튀어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제가 왔을 때 1층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하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을 들것에 실어 이송하고 있었다”고 했다.

    불길이 빠른 속도로 번진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방화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경찰은 이번 화재가 범죄일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방화 등 범죄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26일 오전 합동 현장 감식을 해 정확한 발화 지점과 화재 원인 등을 규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프링클러나 화재 경보기 등 이 아파트에 설치된 화재 관련 장비는 정상 작동했지만 여러 허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아파트는 2001년 준공한 아파트여서 16층 이상에만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었다. 화재 경보기도 화재 발생 가구 바로 위아래 한 층만 울리게 돼 있었다.

    대다수 주민은 관리사무소의 방송을 듣고 대피하려 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복도에 유독가스가 가득 차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베란다에서 구조를 기다렸다.

    제진주 전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층별로 계단에 있는 방화문을 잘 닫아뒀더라면 위쪽으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가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화재 경보기가 울리면 방화문이 자동으로 닫히도록 연동하는 시스템을 설치하거나, 평소에 방화문 잘 닫고 다니기를 생활화해야 한다”고 했다.

    불이 난 아파트 1층 공간이 트인 ‘필로티’ 구조여서 화재에 취약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1층이 비어 있는 필로티 구조 특성상 출입구로 외부 공기 유입이 활발해 불이 빠르게 확산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했다.

    발화 지점인 아파트 3층의 김모(77)씨 부부는 화재 발생 직후에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다. 또 다른 70대 주민 A씨는 20층 계단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으나, 심폐 소생술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아파트 주민 200여 명이 대피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오후 페이스북을 통해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성탄절 연휴에 서울 아파트 화재 현장을 비롯해 많은 곳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며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슬픔에 잠겨 계실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 말씀을 드리며 사고로 부상한 분들의 쾌유를 기원한다”고 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3/12/26/EX44N6MKQFEL5M3BPMOXBOHT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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