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만물상] 부모, 자식, 돈
    짧은글 긴여운~ 2007. 12. 11. 11:06

     

     

    [만물상] 부모, 자식, 돈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

    입력 : 2007.12.10 22:53

     

    미국 어느 마을 ‘렌드 어 백(Lend-a-back)’이라는 회사는 ‘등을 빌려준다’는 이름처럼 힘든 일을 대신 해준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 혼자 사는 할머니가 트리를 세워 달라고 의뢰해 온다. 직원이 할머니 집 다락에서 트리와 장식들을 꺼내 차려주고는 왜 뒤늦게 트리를 챙기느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아들 부부와 손자들이 여행길에 잠깐 들른다고 한다. 정말 어쩌다 오는 기회여서 기쁘게 해주고 싶다.” 한 단편소설에 나오는 얘기다.


    ▶늙어갈수록 자식 보고픈 부모 마음에 무슨 이유며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물신(物神)이 지배하는 지금 세상에선 돈과 부모와 자식의 삼각함수가 그리 간단치 않다. 연전에 행정도시 이전지가 발표된 뒤 땅값이 치솟은 시골에 갑자기 ‘효자’가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마을 이장은 “명절에나 얼굴을 비치던 자식들이 틈만 나면 손자 손잡고 오는 경우가 세 집에 하나꼴”이라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어느 할머니는 몸이 아플수록 자식이 보고 싶어 꾀를 냈다. 누워 있는 요 밑에 만원짜리 몇 장을 깔아놓고 손자들이 오면 한 장씩 꺼내 준다. 신이 난 손자들이 할머니댁에 가자고 부모를 조르고 그 덕에 할머니는 자식들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게 된다. 요즘 “돈 있어야 부모 대접도 받는다”는 말은 자조(自嘲)가 아니라 상식이다. 은퇴자들은 재산을 일찍 물려준 뒤 교통비도 없이 눈칫밥 먹는 친구들 얘기를 흔히 듣는다.


    ▶“자식 얼굴 자주 보려면 죽을 때까지 돈을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이 씁쓸한 현실을 숫자로 확인하는 조사통계가 나왔다. 숭실대 정재기 교수가 따로 사는 부모와 자식 1300명을 조사해 26개국 조사결과와 비교했더니 유독 한국 부모만 돈이 많을수록 자녀 대면 접촉이 잦았다고 한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친족 외 인적 교류가 커져 친족 접촉 빈도는 낮아진다”는 학계 통설과 우리만 반대였다.


    ▶‘부모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뵌다’는 자녀도 26%(아버지), 27%(어머니)밖에 안 돼 맨 꼴찌였다. 갑자기 큰돈이 필요할 땐 52%가 “가족에게 의존한다”고 했고 우울할 땐 55%가 “친구와 상의한다”고 했다. “내리사랑 있어도 치사랑 없다”는 묵은 격언을 위안 삼기엔 조사결과가 참 싸늘하다. 냉정한 서양 부모와 달리 우리 부모들은 당장 춥고 덜 먹더라도 자식부터 챙긴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이 부모란 늘 무조건 무한정 내주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일보 12.11)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