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우울증에 매년 1400조원 사라져…‘제2의 팬데믹’ 정신질환
    지금 이곳에선 2022. 10. 21. 21:59

    우울증에 매년 1400조원 사라져…‘제2의 팬데믹’ 정신질환

    [Cover Story] 코로나 거치며 급증한 ‘정신질환 팬데믹’

    입력 2022.10.13 22:00

    그래픽=김의균
    미국에선 최근 몇 년 사이 난치성 우울증 환자 약물 치료에 특화된 ‘케타민 클리닉’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케타민 클리닉은 다국적 제약사 얀센이 수면 마취제에 쓰이는 약물 케타민을 기반으로 개발한 비강(鼻腔)용 스프레이 방식의 항우울제 ‘스프라바토(에스케타민)’를 처방해주는 개인 병원을 말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정신 질환 치료 목적의 에스케타민 사용을 처음 승인한 지난 2019년 미 전역의 케타민 클리닉은 15~20곳에 그쳤다.
    하지만 올해 들어 400곳 이상이 돼 최소 20배 불어났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을 거치면서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자 케타민 클리닉 수요도 치솟은 것이다. 시장조사 기관 마이어 리서치에 따르면, 미국의 케타민 치료 매출은 올해 기준 1억8500만달러(약 2599억원)에 달한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가 또 다른 팬데믹을 낳고 있다. 정신 질환 팬데믹이다.
    사회적 봉쇄에 따른 고립으로 시작해 뒤이어 터진 인플레이션 대란과 경기 침체 우려 등 사회·경제적 악재가 이어지면서 시민들의 정신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작년 초 기준 미국 성인의 41.5%가 불안이나 우울증 증상을 나타냈다고 보고했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수치(10.8%)의 약 4배 수준이다. 뉴욕시립대 공중보건정책대학원의 르네 굿윈 역학·생물통계학 교수는 “우울증은 미국에서 매우 흔해져 전염병 수준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경제 손실만 연간 1조달러
    정신 질환 증가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6월 발표한 세계 정신 건강 보고서에서 “전 세계적으로 약 10억명(2019년 기준)이 어떤 식으로든 정신 장애를 앓고 있다”며 “팬데믹 첫해(2020년)에 우울증과 불안 장애 사례 비율이 25% 넘게 증가했다”고 추정했다. 한국도 상황이 비슷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지난해 진료를 받은 우울증·불안장애 환자는 약 180만명으로, 2019년 대비 15.6% 늘어났다. 국제 여론조사 기관 갤럽은 작년 12월 “다음 글로벌 팬데믹은 정신 건강”이라며 “불안과 우울증은 개인을 병들게 하는 걸 넘어 가족과 팀, 학교와 주변 모든 기관을 쇠약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신 질환은 그간 개인의 영역 또는 보건 문제로만 여겨져 왔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커지는 규모는 이제 세계 경제에도 커다란 짐이다. WHO와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달 28일 ‘직장 노동자들에 대한 정신 건강 관리 지침’을 처음 발표하면서 “우울증과 불안으로 매년 120억일 노동 손실이 발생하고, 세계 경제에 끼치는 연간 손실만 거의 1조달러(약 1405조5000억원)나 된다”고 지적했다. 정신 건강 악화에 따른 잦은 결근과 퇴사, 업무 성과 저하 등으로 작년 한국 GDP(국내총생산) 총액(1조8102억달러)의 절반 이상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정신 건강 문제는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일손 부족을 부른 ‘대(大)사직(Great Resignation)’ 열풍의 배경 중 하나로도 꼽힌다. 비영리 기구 마인드 셰어 파트너스가 미국의 정규직 직장인 1500명을 조사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50%가 정신 건강을 이유로 직장을 떠난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같은 조사에서는 34%대였다.
    보고서는 “2019년 이직률은 이미 놀라울 정도로 높았지만, 그 이후 훨씬 더 높아졌다”며 “밀레니얼 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 출생) 68%와 Z세대(1990년대 후반~2010년대 초 출생) 81%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정신 건강을 이유로 직장을 떠났다”고 분석했다.

    ◇급성장하는 우울증 치료제 시장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관련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 기관 그랜드 뷰 리서치는 정신 건강 관리를 지원하는 모바일 앱(App) 시장 규모만 작년 기준 42억달러(약 6조원)로 집계했는데, 이는 팬데믹 전인 2019년 시장 규모 대비 54.6% 성장한 수준이다.
    돈 냄새 잘 맡는 투자자들도 이 분야에서 차세대 텐베거(10배 수익률을 낸 주식 종목)를 찾는 중이다.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신생 기업)을 추적하는 시장조사 기관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 한 해에만 정신 건강 분야 유니콘이 9곳 등장했다. 90%가 미국 기업이다.
    정신 질환에 대한 온라인 약물 처방 플랫폼으로 기업 가치 48억달러를 인정받은 서리브럴, 영국 해리 왕자의 임원 합류로 유명해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베터업(기업 가치 47억달러) 등 정신 건강 유니콘 상위 10곳이 유치한 투자금만 50억달러(약 7조800억원) 에 이른다.
    이 중에는 한국계 미국인 에이프릴 고(30)가 창업한 AI(인공지능) 기반의 정신 건강 관리 기업 스프링 헬스(기업 가치 20억달러)도 포함돼 있다. 거대 기술 기업도 발을 걸치고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지난 8월 스마트폰 기반의 맞춤형 정신 건강 관리 플랫폼 기업인 진저를 인수했다.

    케타민처럼 마약 성분을 우울증 치료제로 개발하는 사이키델릭(Psychedelic) 치료 산업에도 돈이 몰리고 있다. 예컨대 지난해 4월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면서 주목받은 생명 공학 기업 마인드-메드(Mind-med)만 해도 LSD(환각제)를 활용해 우울증과 중독 증세를 치료하는 미세 투여 치료제 및 치료 요법을 개발 중이다. 정신 건강 분야 전문 벤처 투자 회사 사이메드 벤처스는 2500만달러를 모금해 이 중 1700만달러를 이런 사이키델릭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투자 열풍이 자칫 부메랑이 돼 정신 건강을 되레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자칫 합법화된 마약이 시중에 대량 유통되면서 중독 문제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미·중 간 신(新)아편전쟁을 촉발한 신종 마약 펜타닐도 처음엔 얀센이 개발한 ‘마약성 진통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1년 특허 만료 후 복제약이 쏟아지면서 제약 업체의 로비와 의사의 무분별한 처방에 의해 수많은 오·남용자와 사망자를 낳았다. 프로작(항우울제) 이후 약 30년 만에 나온 우울증 분야 신약인 에스케타민이나 앞으로 개발될 사이키델릭 치료제가 비슷한 경로를 밟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뉴욕타임스는 “월가는 정신 변화 약물을 판매하는 회사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며 “이런 약물은 모두 같지 않고 위험이 따른다”고 경고했다.
    ◇“직원 정신 건강 챙겨라” 기업들 비상
    정신 질환이 전염병처럼 번지면서 기업들도 직원들의 정신 건강에 관심을 쏟고 있다. 방치할 경우 자칫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차원의 부담으로 부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 통신사 텔레콤은 민영화 과정에서 10년간(2000~2010년) 과도한 업무와 부적절한 부서 배치, 경영진의 강압적 태도 등을 이유로 직원 200여 명이 자살해 ‘연쇄 자살 공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애플의 최대 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기업 폭스콘 역시 2010년 한 해에만 중국 공장 직원 18명이 자살을 시도해 14명이 죽는 등 열악한 노동 환경과 노동 착취 실태가 알려지며 미국에서 아이폰·아이패드 불매운동이 촉발되기도 했다.

    그래픽=양진경
    이런 위험 요소가 불거지기 전에 대비책을 마련하는 게 경영 측면에서도 효율적이다.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에 따르면, 정신 건강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기업은 지출 1달러당 연간 투자수익률(ROI) 중앙값이 1.62달러로 나타났다. 3년 이상 프로그램을 유지할 경우 ROI는 2.18달러로 증가했다.
    또 다른 연구에선 위기 상담, 행동 건강 검진 및 정서적 건강 지도와 같은 조기 개입 프로그램이 지출 1달러당 최대 65달러의 ROI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미국 포브스는 “다른 비즈니스 투자와 비교할 때 이런 프로그램 투자는 저렴하다”며 “정신 건강은 이제 비즈니스 지표”라고 평가했다. 기업들이 직원들의 정신 건강을 챙기는 대표적 수단은 ‘근로자 지원 프로그램(EAP·Employee Assistance Program)’이다.
    EAP는 신체 건강부터 부부·가족 생활, 법·재정, 알코올·약물, 스트레스와 정서 문제 등 업무 성과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근로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사내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1930년대 서구에서 직장 내 음주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시간이 지나며 정신 건강까지 기능이 확대됐다. 가령, 미국의 보험사 프루덴셜 같은 경우 부모의 치매나 낙상 같은 건강 문제에도 전문가 전화 상담을 지원하는 등 직원 가족까지 EAP를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존슨앤드존슨·포드·휼렛패커드·쿼드그래픽스 등도 오래전부터 정신 건강 관련 검사와 상담 시스템을 지원 중이다. 미국 근로자지원전문가협회(EAPA)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상시 근로자 5000명 초과 사업장은 97%, 1001~5000명 이하 사업장은 80%, 251~1000명 이하 사업장은 75%가 EAP를 제공한다.
    직원들의 사기 저하를 막는 수단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더 다양해지는 추세다.
    마인드 셰어 파트너스에 따르면, 작년과 2019년을 비교했을 때 직원들에게 추가 유급 휴가를 제공하는 미국 기업은 55% 증가했고, 정신 건강의 날(41%)과 정신 건강 교육(33%) 등을 시행하는 기업도 늘어났다. BBC는 “팬데믹 동안 직원들의 정신 건강 문제가 대두하자 많은 기업이 신속한 대응에 나섰다”며 “2020년 4월 EAP를 시행하던 미국 기업 중 25%가 사별 관련 상담 등을 포함해 서비스 제공 범위를 확대했고, 57%는 직원들이 받을 수 있는 지원 내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홍보했다”고 전했다.
    ◇국내도 정신 질환 산재 두 배로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에서도 유달리 근로시간이 길기로 유명하다. 그런 만큼 직장인들의 정신 건강 문제도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2019년 331건이었던 정신 건강 관련 산업 재해 신청 건수는 지난해 695건으로 2배 이상이 됐다. 이 중 산재로 인정받은 비율은 70.8%(492건)에 이른다. 과로에 따른 번아웃과 상사의 폭언, 직장 내 괴롭힘 등 각종 직무 스트레스에 따른 정신 질환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신 건강 관련 EAP를 운영 중이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은 1994년 삼성생활문화센터를 개설해 직원들의 정신 건강 상담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2011년부터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상주 중이다. 올 들어서는 국내 한 대형 로펌과 업무 협약을 맺고 계열사 직원들의 도산 처리도 돕는다.
    증시와 가상 화폐 시장이 폭락으로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본 직원이 늘어나자 개인 회생이나 파산 희망 수요를 조사한 뒤 로펌을 연결해 주는 방식이다. 파산 관재인 선임 비용과 변호사 수임료 같은 비용도 회사가 일부 부담해 준다. 현대차와 LG전자, SK이노베이션, 한국수자원공사 등 다른 기업들 역시 관련 EAP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정신 질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EAP 활용률은 저조한 편이다. 자칫 회사에서 문제 있는 직원으로 낙인 찍히거나 정보 유출로 승진이나 이직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실제 수요가 많지 않은 것이다. 국내 기업의 EAP 활용률은 5%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경기 침체 우려까지 불거지자 국내 기업들은 미국과 달리 허리띠를 졸라매기 위해 정신 건강 관련 지출을 대폭 줄이는 추세다.
    삼성·SK·현대차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의 정신 건강관리 업무를 위탁받아 처리하는 EAP 전문 기관인 강북삼성병원 산하 기업정신건강연구소의 경우 팬데믹 이후 2년 간 정신 건강 관리 위탁 업무에 대한 기업 수요가 4분의 1 토막이 났다. 전상원(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부소장은 “국내 정신 질환 진단율이나 방문율, 외래 진료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도 정작 기업들은 불필요한 비용을 줄인다며 정신 건강 분야 지출부터 손을 대고 있다”고 말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