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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만한 대한민국 소비자] 2. "미국식 안 된다"는 기업들 미국서 소송
    지금 이곳에선 2022. 9. 15. 14:40

    [만만한 대한민국 소비자] 2. "미국식 안 된다"는 기업들 미국서 소송

     
     

    이범준

    2022년 09월 14일 14시 00분

    21세기 기업은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돈을 벌어들이지만, 소비자는 자신이 사는 나라의 법률과 법원을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법제도는 삼성, 애플, 폭스바겐, 옥시 같은 글로벌 기업에 유난히 유리합니다. 이들 회사가 휴대전화의 성능을 속이고 엉터리 살균제를 만들어도 한국 소비자는 좀처럼 배상받기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 소비자는 한국의 수천 배 넘는 배상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기업은 더욱 부도덕해지고, 소비자는 더욱 불리해집니다. 글로벌 기업 시대, 한국의 소비자 권리를 5회에 걸쳐 살펴봅니다. <편집자 주>

    1. 집단소송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

    2. “미국식 안 된다”는 기업들 미국서 소송

    한국 대기업은 '클래스 액션'(class action)을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을 때마다 반대해왔다. 이들의 반대 논거는 소비자가 직접 소송해서 바로 잡는 것보다 공적 기구가 과징금을 부과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이유는 한국 법제가 미국식이 아니라 유럽식이라서라고 했다.

    클래스 액션 도입 논의가 활발하던 때가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이 문제된 2016년 무렵이다. 당시 클래스 액션 도입에 관한 세미나를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열었다. 한국경제연구원 측은 유럽식 사법제도인 한국에서는 미국식 클래스 액션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소속 연구위원은 “우리와 비슷한 법체계와 기업규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는 유럽에서의 논의를 심도 있게 검토하며 대안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공적 규제 등의 제도들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이 유럽 법체계와 부합할 수 있고 오히려 집단소송제도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고 했다. 공적 규제란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행정 기구가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위는 과징금을 얼마나 어떻게 부과할까. 2010년 무렵 운동화 제조사들이 신고만 있어도 살이 빠진다는 신발을 광고해 매출을 크게 올렸다. 이들은 광고 문구로 ‘다이어트 그만하고 신기만 해라’ ‘10걸음으로 12걸음의 효과를’ ‘같은 움직임에 3배 높은 칼로리 소모’, ‘최대 28% 허벅지‧종아리‧엉덩이 근육운동 활성화 효과’, ‘칼로리 소모량 10% 더 높아’ 등을 내세웠다.

    이렇게 기업이 소비자를 속이는 행위를 규제하는 법률이 표시광고법이다. 표시광고법을 위반한 기업에도 공정거래위원회가 과징금을 부과한다.

    리복을 비롯한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들은 2010년 신는 것만으로 살이 더 빠진다는 운동화를 팔아 세계적으로 많은 수익을 올렸다. 이는 거짓과장 광고로 드러났다. 하지만 한국과 외국에서 리복이 치른 대가는 너무나 달랐다. 2010년 3월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열린 살빠지는 운동화 홍보 행사. (출처:연합뉴스)

    ‘살 빠지는 운동화’ 한국서는 과징금 2억원, 미국서는 손해배상 500억원

    공정거래위원회는 2014년 과징금 10억 7000만원을 9개 회사에 부과했다. 가장 많은 과징금을 받은 리복은 3억 9900만원, 스케쳐스가 2억 1700만원으로 다음이다.

    그런데 허위 기능성 신발이 한창 팔리던 2011년 이들 업체의 한 해 국내 매출액은 7000억원에 달했다. 1년치 매출액과 비교해도 과징금은 0.1% 수준이다. 게다가 과징금을 부과한 때도 2014년으로 너무 늦은 터였다. 클래스 액션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는 소송 절차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공정위는 국가기관 제재라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미국·캐나다 등에서는 법원을 통한 동의 의결로 합의됐고, 호주에서도 법원 절차가 진행됐다”면서 “기능성 신발 부당광고에 대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경쟁당국이 제재한 것”이라고 했다. 똑같은 사건으로 미국에서는 2011년에 리복 등을 상대로 클래스 액션이 제기돼 있었다. 오하이오주 북부 연방지방법원은 소비자에게 거액을 배상하라는 동의판결(Consent decree)을 내렸고, 이를 제조사들과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리복은 소비자피해 배상금 2500만 달러(337억원, 1달러 1350원 기준)를 내놓고 소비자에게 구매 금액의 87%를 돌려주었다. 스케쳐스도 배상금 4000만 달러(540억 원)를 내놓고 소비자에게 40∼80달러(5만 4000원~10만 8000원)를 지급했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허위‧과장 광고로 벌어들인 매출액의 극히 일부만 과징금으로 물어냈고, 미국에서는 부당 매출액 대부분을 토해냈다.

    대기업이 얘기하는 경쟁당국은 한국에도 미국에도 있지만, 클래스 액션 제도가 없는 한국에서 기업들은 과징금 외에 배상금을 무는 일이 거의 없다.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한 2014년 한국에서도 리복과 스케쳐스 등에 환급을 요구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후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 역시 없었으며 설령 있었다 해도 전체 피해 소비자의 일부에 불과하다. 기업으로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구현주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는 “한국 사법제도가 과징금이라는 기존 방식을 고수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서는 불법행위를 저지르기에 부담이 적은 시장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클래스 액션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기업 측이 증거를 감추지 못하게 하는 증거개시(Discovery·開示)가 함께 도입되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 제도가 없으면 클래스 액션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이 증거를 은폐‧조작하는 경우 소비자는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래스 액션 제도를 가진 국가에서는 증거개시 제도가 반드시 함께 있다.

    증거개시를 통해 피해자들이 가해자 측 내부 문서를 확보할 수 있고, 가해자가 불법행위로 얻은 수익규모, 자산이나 재정 상태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기업에서 비밀보호를 요청할 경우, 법원은 기업에서 제출받은 정보를 소비자에게 직접 공개하지 않고 중립적인 제삼자가 조사해 보고서를 법원에 내도록 하기도 한다. 이런데도 기업이 증거개시에 응하지 않으면 법원은 기업에 곧바로 패소 판결을 한다.

    기업들은 이렇게 소송 전에 증거를 내도록 하는 제도는 경제에 악영향이 크다며 반대한다. 증거개시에 대해 대기업 관계자들은 “기업정보나 경영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 특히 유출된 영업기밀을 경쟁사가 악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이해가 달린 사건에서는 적극적으로 증거개시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에 관할을 만들어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 법원과 제도가 부실하다며 외국 법원과 제도를 선택한 셈이다.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기한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LG 측 주장을 인정하는 최종 심결이 내려졌다. LG가 미국 사법기관에서 SK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이유는, 증거를 내지 않으면 강력하게 제제하는 재판제도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사진은 미국에서 심결이 내려진 2021년 2월 두 회사 본사 모습. (출처:연합뉴스)

    '클래스 액션' 반대하는 대기업, 자신들은 미국 사법제도 이용

    2019년 전기자동차 배터리 기업인 엘지화학(이후 LG에너지솔루션으로 분사)은 SK이노베이션이 LG의 배터리 기술진을 데려가 영업비밀을 빼냈다며 소를 제기했다. 그런데 소를 제기한 곳이 한국 법원이 아닌 미국 델라웨어 등 법원이다. 이 가운데 국제무역위원회(ITC)도 있는데 외국 상품이 미국 산업에 해를 끼치거나 지식 재산권을 침해하는지를 판단하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다.

    LG화학은 미국에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소송 당사자가 보유한 각종 정보와 자료를 상대방이 요구하면 반드시 제출해야 하는 강력한 증거개시 절차가 있어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고 했다. 이런 제도 덕분에 LG화학은 SK에 2조원 규모의 배상액을 받았다.

    그런데 LG와 SK가 미국에서 소송을 벌인 전기자동차 배터리 기술은 산업기술보호법이 정한 국가핵심기술이다.

    산업기술보호법 제1조는 ‘산업기술의 부정한 유출을 방지하고 산업기술을 보호함으로써 국내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두 회사가 미국에서 소송을 벌이면서 국가핵심기술이 미국으로 사실상 이전됐다는 논란이 일었다. 그래서 SK는 “증거개시 절차가 시작되면 법원은 물론 로펌, 민간 전문가가 심사를 위해 내용을 열람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정보가 유출될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미국에서 소송을 벌이면서 두 회사가 입은 단기 손해도 적지 않다. 로비 비용을 비롯한 소송비용이 최고 1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미국에서 소송이 계속되는 동안 중국 배터리 업체로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거래처를 바꾸었다. 폭스바겐은 LG와 SK가 만드는 ‘파우치형’ 배터리 대신 중국 CATL이 만드는 ‘각형’ 배터리를 주로 쓰겠다고 했고, 현대차도 새로 만드는 아이오닉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중국 CATL에 맡겼다.

    그렇지만 이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인 피해를 막고, 시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LG와 같은 대기업의 판단이다. 이런 대기업들이 소비자가 제기하는 클래스 액션만 반대한다.

    전경련 관련 단체는 클래스 액션에 관한 설명자료에서 “(클래스 액션이 있는 나라에서) 클래스 액션이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이고 몇 년을 끌어 승소하더라도 잃는 게 더 많아서 기업들은 (중략) 화해를 통해 합의금을 주고 빨리 소송을 종결짓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업이 화해에 응하는 이유는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증거개시 제도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뒤집어 말하면 증거개시 제도가 없으면 기업들이 클래스 액션을 비롯한 소송에서 화해에 응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LG와 SK의 소송도 일종의 화해로 마무리됐다.

    판사 출신인 전휴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발표한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에서 증거개시 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나라 민사소송에서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당사자가 자진하여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 한 그 제출을 강제할 방법이 거의 없다. 상대방이 이렇게 대응하는 이유는 문서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에 소송에서 받는 불이익이나 제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문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승소 가능성이 커지고 부제출에 대한 제재도 거의 없는데 과연 누가 성실하게 문서를 제출하고자 할 것인가.

    특히 법인이나 공공기관은 자료들을 전자정보 형태로 축적·관리하는데, 개인이 이러한 단체를 대상으로 소송하려고 할 경우 전자정보 수집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클래스 액션과 무관하게 증거개시 제도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휴재 교수는 뉴스타파 인터뷰에서 “기본적으로 증거개시 도입에는 찬성하지만 구체적인 제도 설계는 여러 나라 제도의 장단점을 살펴 우리 실정에 맞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제작진

    디자인
    이도현
    출판
    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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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tapa.org/article/RjN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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