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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셋이 젊은 남자들과 바람 났습니다”···치명적 불륜이 바꾼 프랑스역사 [사색(史色)]문화 광장 2024. 6. 23. 10:28
“며느리 셋이 젊은 남자들과 바람 났습니다”···치명적 불륜이 바꾼 프랑스역사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 penkang@mk.co.kr
입력 : 2024-06-18 13:00:00 수정 : 2024-06-22 12:32:40
[사색-74] “세 분 모두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며느리의 간통 소식을 들은 직후였습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셋. 산전수전 겪은 그였지만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부하를 불렀습니다. 진상조사를 위해서였습니다. 수 개월의 물밑 조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도착한 결과. “둘은 바람이 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막내 며느리는 의심스럽지만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저 탑에서 참 뜨거웠지. ” 영화 ‘라 투르 드 네슬’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이제 남은 건 그의 결단. 그는 나지막이 읊조립니다. “두 새끼를 잡아서, 성기를 잘라 개에게 주거라.” 며느리 둘은 삭발된 채 탑에 갇혔습니다.
중세 프랑스를 뒤흔든 ‘네슬레 탑’ 사건입니다. 정사가 수 차례 일어난 네슬레 탑의 이름을 땄습니다. 보고를 받은 사내의 이름은 필리프 4세. 미남왕으로 이름나 중앙집권적 국가의 초석을 다진 그의 말년은 며느리 스캔들로 바람잘 날이 없었습니다.
“미남인 나의 말년에 왜 이런 일이...” 필리프4세.
사건의 나비효과는 엄청났습니다. 당시 지배집단인 카페 왕조가 대가 끊겼고,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잉글랜드와 100년 전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13일 금요일, 그 날의 저주가 결국 왕조를 멸망시켰군.”
프랑스 시민들은 며느리들의 바람이 문제가 아니었다고 수근댑니다. 몇해 전 13일의 금요일에 일어난 ‘그 사건’이 프랑스 불운의 원인이었다는 믿음. 유럽이 13일의 금요일을 께름찍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때부터였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 사건’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봉건제도 종식을 선언한 왕 필리프4세
그날의 사건을 보기 전에, 미남왕 필리프 4세의 치세부터. 1286년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한 필리프 4세는 누구보다 왕권 강화에 공을 들이는 군주였습니다. 강력한 봉건 영주들의 영향력을 왕의 것으로 취하려던 것이었지요. 권력이 제한적인 전임자들과는 결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거만한 영주들을 제압하고 프랑스를 유럽의 강자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야망까지. 프랑스 파미에 주교 베르나르 세셋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필리프 4세는 사람도, 짐승도 아니다. 그는 동상이다.”
“권력은 본디 나누는 게 아닌 것이니라.” 필리프4세.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력한 영주는 비옥한 영토 아키텐의 공작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1세’. 잉글랜드의 왕을 겸임한 인물이었지요. 그는 잉글랜드에선 왕이었지만 아키텐의 영토에서는 필리프4세에게 오마쥬(충성 서약)를 바치고 지배권을 행사하는 ‘공작’이었습니다.
아키텐은 전체 세수가 잉글랜드 전체를 뛰어넘는다고 할 정도로 옥토 중 옥토.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신하의 맹세인 ‘오마쥬’를 바치더라도, 그 가치는 충분했습니다.
아키텐은 비옥한 포도밭이 광활히 펼처진 비옥한 농토였다. 사진은 아키텐의 도시인 생테밀리옹 지역. [사진출처=Chensiyuan]
필리프4세로서는 반드시 왕의 ‘직할지’로 찾아야 하는 땅이 ‘아키텐’이었습니다. 포도밭이 광활히 펼쳐진 프랑스의 ‘와인잔’이 해협 너머 잉글랜드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국부유출’이었습니다.
왕보다 센 공작 에드워드1세와 전쟁을 준비하다
“에드워드 1세를 파리 궁정으로 들라하라.”
사달이 일어났습니다. 영국해협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선원들이 충돌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이었지요. 수십 명이 사망한 대참사. 필리프 4세는 이를 기회로 봤습니다. 에드워드 1세의 자존심을 밟아놓고 싸움을 걸 요량이었지요.
“제 땅은 건들지 마옵소서, 필리프4세 전하.” 빨간 옷을 입은 에드워드1세가 필리프4세에게 오마쥬를 바치는 모습.
그를 궁정으로 호출해 ‘주군’인 자신에게 공식 사과를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에드워드는 대사들을 대신 보내려 했지만, 필리프 4세는 완고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 역시 끝까지 거부로 맞섭니다.
이제 명분은 충분합니다. 필리프 4세는 대외적으로 공표합니다. “나의 신하 에드워드가 영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짐은 공개적으로 에드워드의 영지를 몰수하노라.”
“나와 한판 붙자는 것이냐.” 빨간옷의 에드워드1세와 파란 옷의 필리프4세.
에드워드 1세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습니다. 프랑스 영지를 빼앗기면 국가 운영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필리프 4세와 에드워드 1세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가스코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시작해 혼인으로 봉합하다
에드워드 1세는 수 천의 군사를 대륙으로 파견합니다. 전쟁은 그러나 지지부진 했습니다. 마을 일부를 빼앗더라도 금방 프랑스의 보복이 이어졌지요. 프랑스와 잉글랜드 내부의 눈엣가시도 많았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를 계속 공격했고, 플랑드르도 프랑스 왕가에 저항을 계속합니다.
필리프 4세와 에드워드 1세가 잠시 전쟁을 멈추기로 합의한 배경이지요. 두 사람은 대신에 각자의 자녀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합니다. 프랑스의 공주 이사벨라와 잉글랜드의 왕자 에드워드 2세의 혼인이었습니다.
“잉글랜드 남자에게 꼭 시집 가야 하나요.” 필리프4세의 딸 이사벨라.
필리프 4세의 야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부자를 우선 정리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플랑드르 백작이 그 첫 대상이었습니다. 플랑드르는 특산품 양모 대부분을 잉글랜드로 수출할 정도로 둘은 경제적으로 끈끈했습니다. 내부 배신자부터 정리하고 외부로 총부리를 돌려야 하는 것은 전쟁의 기본.
필리프 4세와 플랑드르 백작이 몽앙페벨에서 맞붙습니다. 결과는 프랑스의 승리. 1305년 6월 23일 양측은 조약을 체결합니다. 플랑드르 상당수의 땅과 금전을 필리프 4세에게 바친다는 굴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필리프 4세의 이름 앞에는 ‘명군’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합니다.
영주들의 영토를 직할지로 바꾸는 데 성공한 필리프4세.
전쟁 계산서가 위기를 부르다
전쟁은 언제나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사치적 정치행위’입니다. 필리프 4세의 왕권은 강화됐지만, 그에게 계산서가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경제난이 벌어져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었지요.
필리프 4세는 위기 때 남의 것을 빼앗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지요. 당대 가장 부유한 이들에게 눈을 돌립니다. 바로 십자군 기사단과 가톨릭 성직자였습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걷을 권리가 있어 왕에 버금가는 재력을 자랑했습니다.
돈 많은 유지들은 사망할 때 재산을 왕보다 기사단에게 기부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종교적으로 경건해진 자세로 신께 나아가겠다는 의지였습니다.
필리프4세가 발행한 금화. 그러나 그는 잇단 전쟁으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사진출처=cgb.fr]
종교계와 전쟁 선포한 필리프4세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라.”
필리프 4세는 그야말로 전면전을 선포합니다. 가톨릭 성직자와 십자군 기사단에게 세금을 부과하라는 파격적 조치였습니다. “신의 사람들에게 세속 왕이 세금을 걷을 권리가 없다”는 반발이 폭발합니다.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는 “구원을 얻기 위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칙서를 발표합니다. 필리프 4세가 굴종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로 심복 기욤 드 노가레를 보냅니다.
“저 사탄같은 놈을 봤나.”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
기욤 드 노가레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보나파키우스 8세.
기욤은 교황의 뺨을 때린 뒤 3일간 그를 구타합니다. 보나파키우스 8세는 굴욕 속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차기 교황은 필리프 4세의 사람으로 임명됩니다.
프랑스 대주교 베르트랑 드 고트가 클레멘스 5세로 교황에 오릅니다. 교황청은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졌지요. ‘아비뇽 유수’였습니다. 필리프 4세는 종교와 권력을 모두 쥔 전제군주로 거듭납니다.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궁이 생긴 이유는 필리프4세가 가톨릭 교황의 수도를 강제로 이전시켰기 때문이다. [사진출처=Jean-Marc Rosier]
신의 군대를 학살한 필리프 4세
아직 적수는 남아있었습니다. 프랑스 영토 내 템플 기사단원이었습니다. 무력과 재력을 동시에 겸비한 우월적 존재들. 언제든 왕에게 반격을 가할 수있는 세력이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그들을 이단혐의로 기소합니다. 십자가에 침을 뱉고, 남색을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들. 필리프 4세는 거짓도 진실로 만들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이와 기사단 교육단장 조프루아 드 샤르니를 비롯한 기사단 주요 인사들이 모두 체포됩니다.
“필리프 4세 당신은 저주받을 것이야.” 23대 템플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이.
1307년 10월 13일의 금요일의 일이었습니다. 이 때까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 사건이 프랑스의 역사를 바꿀 것이라는 걸.
필리프 4세는 기사단의 재산을 모두 왕실의 것으로 몰수합니다. 허수아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침묵합니다.
수장 자크 드 몰레이는 화형에 처합니다. 불길이 그의 몸을 태우고 있을 때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복수하실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후손에게 말입니다.” 1314년 3월 11일이었습니다.
“이 남색가들을 당장 죽여라(그리고 돈을 빼앗아라).” 기사단을 학살하는 필리프 4세.
기사단의 저주처럼 무너지기 시작한 프랑스
신이 자크 드 몰레이의 말을 들었던 것일까요. 화형식 한달 후, 꼭두각시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죽었습니다. 약 7개월 후에는 며느리들이 기사들과 탑에서 정사를 나눈 대형 섹스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투르 드 네슬 사건’이었습니다.
이로부터 한달 뒤 필리프 4세도 사냥에 나갔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후임자는 아들 루이 10세. 그는 10년을 집권하지 못하고 결국 이른 죽음을 맞았습니다.
필리프 4세의 두 며느리가 간음죄 선고를 받은 후 감금된 성 샤토-가이야르. [사진출처=토마스 울리히]
뒤를 이은 동생 필리프 5세와 샤를 4세도 재위를 오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제 필리프 4세의 핏줄은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자크 드 몰레이가 죽은지 14년만에,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 왕조’가 몰락했습니다.
필리프 4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로 시집간 이사벨라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지요. 잉글랜드의 위대한 군주 ‘에드워드 3세’였습니다. 그는 이제 선언합니다. “필립프 4세의 외손자인 내가 프랑스의 왕이 되겠다.”
100년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3일 금요일의 그 사건이 부른 저주였습니다. 정치적 과욕이 부른 파국이었습니다.
“그 때 내가 너무 심했나. ” 필리프 4세의 죽음.
<네줄요약>
ㅇ프랑스 중세 왕 필리프 4세는 잇단 전쟁으로 왕권을 강화했지만 그만큼 돈이 필요했다.
ㅇ많은 재력을 보유한 십자군 기사단을 남색 혐의로 기소해 그 수장을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13일의 금요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ㅇ그 이후 왕자들의 며느리 셋이 모두 간음하다 적발됐고, 필리프 왕 역시 한달만에 사망했다.
ㅇ카페왕조 대가 끊겨버리면서, ‘기사단의 저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13일의 금요일을 저주의 날로 여긴 이유였다.
<참고문헌>
ㅇ마이클 해그, 템플러-솔로몬의 성전에서 프리메이슨까지 성전기사단의 모든 것, 책과함께, 2015년
**다음주부터는 사색은 격주로 운영합니다. 공백을 메울 녀석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어려운 경제를 역사라는 양념에 버무려 맛있게 차려보려 합니다. ‘사색’의 스핀오프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 부탁 드립니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격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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