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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할 '뻔' 했던 은행강도… 그러나 치밀함은 국제공조를 이기지 못했다지금 이곳에선 2023. 10. 29. 12:55[대전 신협 강도 사건의 막전막후]사업 실패·도박 빚 2억원, 은행강도 결심범행 후 10차례 환복·복잡한 동선 '혼선'신원 파악 늦어지는 사이… 베트남 도주공개 수사 전환 후 교민 제보 덕에 검거
베트남에서 붙잡힌 대전 신협 강도 사건 피의자가 출국 30일 만인 지난달 21일 오전 국내로 송환돼 대전서부경찰서로 들어오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지난달 21일 오전 9시 50분 대전 서부경찰서 현관 앞. 검은색 모자와 흰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건장한 남성이 호송차에서 내리자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울렸다. 치밀한 계획을 세워 경찰 추적을 따돌리고 유유히 해외로 빠져나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전 신협 강도 사건' 피의자 A(47)씨였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포토라인에 선 A씨는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느냐" 등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형사들에게 이끌려 조사실로 사라졌다. 해외 도주 한 달 만에 붙잡힌 A씨는 왜 이런 무모한 범행을 저질렀을까?
사업 부진에 도박빚… 은행 강도 결심
네 명의 자녀를 둔 가장인 A씨는 요식업, 인테리어 등의 사업에 나섰지만, 경기 침체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이 겹치며 번번이 실패했다. 도박에도 손을 대 빚은 몇 년 새 2억 원으로 불어났다. 돈을 빌려 돈을 갚는 이른바 '돌려막기'로 버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빚 청산과 생활비 마련 방법을 고민하던 A씨는 결국 은행을 털기로 작정했다.
많은 현금을 보유한 은행엔 경비가 삼엄하기 마련. 그래서 A씨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우선 도주할 때 이용할 오토바이를 훔칠 계획부터 세웠다. 오토바이 절도는 쉬웠다. 식당 주변엔 대개 시동이 걸린 배달 오토바이가 있기 마련. 그는 8월 17일 오토바이를 손에 넣었다. 이어 인상착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도망칠 시간을 벌어줄 소화기도 이날 문 닫은 건물에서 훔쳤다.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그의 눈에 대전 서구 관저동 W신협이 들어왔다. 도시 외곽에 있어 도주하기 쉽다고 판단한 그는 곧바로 범행을 시도하려 했지만, 마침 그날 W신협 인근에 장이 열려 사람들이 잔뜩 몰리는 바람에 디데이를 다음날로 미뤘다.
옷만 열 번 갈아 입어… 치밀한 도주 행각
보는 눈이 적어진 다음 날(18일) A씨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오전 11시 58분쯤 타깃인 W신협에 헬멧을 쓰고 소화기 분말을 뿌리며 난입했다. 흉기로 여직원을 위협해 현금 3,900만 원을 빼앗아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났다. 범행은 불과 2~3분 사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신협 직원의 비상벨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지만, A씨는 충남 금산까지 오가며 경찰 추적을 따돌렸다. 그는 경찰에 혼선을 주려고 일부러 오토바이를 타다 걷고, 또 택시를 타는 등 여러 교통수단을 번갈아 이용했다. 범행 과정에서 10차례에 걸쳐 옷을 갈아입었고, 폐쇄회로(CC)TV가 없는 한적한 교외길이나 미개통 도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지난 8월 18일 은행 강도 사건이 벌어진 대전 서구 관저동 한 신협에서 직원이 영업 중단을 알리는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경찰 조사결과 A씨는 관저동 범행 현장~진잠동~논산시 벌곡면~금산군 추부면을 통해 도주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12시간 동안 같은 도로를 상·하행 반복해 달렸고, 그 중간에 농로로 이동해 경찰에 혼선을 줬다.
벌곡의 한 주유소에선 신원을 감추기 위해 헬멧을 쓰고, 장갑을 낀 채 한 차례 주유했다. 이날 자정쯤에는 금산군 추부면 도로가 펼침막 뒤에 오토바이를 숨긴 뒤 택시를 타고, 집이 있는 진잠동 방면과 정반대 방향인 대전 중구와 동구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빼앗은 돈을 담은 배낭을 매고, 마스크를 쓴 채 수 차례 택시를 바꿔 타면서 경찰 추적을 피했다.
범행 이틀 뒤인 8월 20일, A씨는 신원 파악조차 못한 경찰을 비웃듯 인천공항을 통해 베트남 다낭으로 출국했다. 탑승권은 이날 새벽 구매해 가장 빨리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항공편이었다.
한 발 늦은 경찰, 용의자 파악했지만 이미 출국
수사는 더뎠다. A씨가 도주한 직후 대전교통정보센터와 신협 인근 건물 등에서 촬영된 폐쇄회로(CC)TV 3,000여 대 영상을 분석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A씨가 서구 변동과 태평동의 중국음식점 앞에서 또 다른 배달 오토바이를 훔치고, 다른 건물에서 소화기를 훔친 사실을 파악했다. 또, A씨가 오토바이 외 다른 교통수단, 특히 차량도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W신협이 있는 서구 관저동과 오토바이가 도난당한 변동과 유성 일대, 오토바이를 버린 금산군 추부면 일대를 중심으로 A씨의 흔적을 쫓았다.
그리고 범행 이튿날인 19일 경찰 수사망에 두 대의 용의 차량이 포착됐다. 승용차와 적재함이 있는 왜건이었다. 차량 동선을 역추적한 경찰은 용의자가 이틀 전인 16일 서구 정림동 육교 인근에 자전거를 가져다 놓았고, 범행 당일인 18일 새벽 이 자전거를 이용해 신협 쪽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했다.
또 왜건 차량은 도주 예상로에 미리 주차해 놓았다.
왜건이 범행에 이용된 정황을 포착한 경찰은 21일 오전 차량을 수색하고, 해당 차량 소유자로부터 "이달 초 A씨가 '일하는 데 필요하다'고 해 잠시 빌려줬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범행 사흘 만에 비로소 용의자를 특정한 순간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왜건 차량은 도주 과정에서 옷을 갈아입는 장소 등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20일 밤 한 다가구주택 인근에서 차량을 찾았지만 용의자 얼굴을 모르고, 주말(일요일)이다 보니 거주하는 주민도 조회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21일 오전 일찍 수색에 나섰다"고 말했다.
경찰은 즉시 A씨 소재 파악과 함께 출국금지 조치에 나섰지만, 이미 A씨가 전날 베트남 다낭으로 도주한 뒤였다.
교민 제보, 베트남 공안 협조로 검거
경찰은 A씨 검거를 위해 즉시 인터폴 적색 수배 조치를 하고,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베트남 공안에 공조를 의뢰했다. 베트남에 나가 있는 경찰 주재관과 대사관 직원들은 현지 공안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단체대화방을 개설해 수사 상황을 공유하며 A씨의 소재 파악에 주력했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계속 꺼놓은 A씨의 생활 반응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대전 서구 W신협에서 현금을 빼앗아 베트남 다낭으로 도주한 A씨가 현지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 대전경찰청 제공
꽉 막힌 수사는 경찰이 마지막으로 꺼내든 공개수사로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고민 끝에 9월 8일 베트남 현지 경찰에 A씨 공개 수배를 의뢰하고, 베트남 한인회에도 수배 전단을 포함해 자세한 정보를 공유하며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이틀 뒤 한 교민이 전단지에 적힌 대전서부경찰서로 연락해 "A씨를 본 것 같다"고 제보했다.
"다낭의 한인 점포에서 교민의 지갑을 훔치는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보니 A씨 같았다"는 내용이었다. 제보를 전달받은 현지 주재관이 해당 점포를 찾아가 CCTV 영상을 다시 살펴보니 A씨의 인상착의와 같았다. 뒤이어 "4~5일 전 A씨를 다낭 한 호텔 카지노에서 봤다", "어제도 카지노에서 (A씨를) 본 것 같다"는 등 추가 제보가 이어졌다.
베트남 경찰 주재관과 대사관 직원들은 이날 오후 A씨가 나타났다는 호텔에 잠복했고, 3시간 만에 카지노에서 바카라 도박을 하던 그를 검거했다.
지난달 10일 오후 베트남 다낭 한 호텔 내 카지노에서 붙잡힌 대전 서구 신협 특수강도 피의자 A씨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대전경찰청 제공
A씨는 체포 당시 한화 200만 원 상당의 카지노칩을 가지고 있었다. 숙소에서도 현금 30여만 원이 발견됐다. 경찰 관계자는 "A씨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발견해 50여분 동안 지켜보며 용의자가 맞는지 확인한 뒤 붙잡았다"며 "A씨는 체포 직후 경찰 초기 조사에서 신협 강도 범행을 시인했으며, 현지에서 교민의 지갑을 훔치는 등 절도 행각도 벌였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압송된 A씨는 경찰조사에서 "3,900만 원 가운데 2,000만 원 정도는 채무 변제와 생활비, 주식 투자 등에 쓰고, 1,300만 원 정도를 도피자금으로 썼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두한 대전경찰청 강력계장은 "베트남과 평소 치안행정 교류를 적극 해 온 덕분에 공개수사 전환 뒤 현지서 조기 검거가 가능했다"며 "범죄자들은 이제 '해외로 도망가면 추적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 최두선 기자 balanced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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