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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급발진 책임 논란]① “운전자가 직접 증명해라”...급발진 인정, ‘하늘의 별따기’
    지금 이곳에선 2023. 6. 28. 19:42

    [급발진 책임 논란]① “운전자가 직접 증명해라”...급발진 인정, ‘하늘의 별따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급발진 사고

    국내에선 제조사 책임 인정 사례 드물어

    소비자가 직접 결함 입증해야 하는 게 한계

    국내에서도 형사 사건에선 급발진 인정되기 시작

    입력 2023.06.28 06:10



    지난 2012년 대구 와룡시장 인근에서 발생한 급발진 추정 사고 현장. /조선DB
    2013년 10월24일(현지 시각) 미국 오클라호마주(州) 1심 법원은 2007년 도요타 차량 급발진 사고로 숨진 피해자와 유족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에게 300만달러(약 38억9800만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도요타 세단 ‘캠리’ 차량이 고속도로 출구에서 급발진하며 장벽에 충돌해 운전자가 중상을 입고 동승자가 사망한 사건으로, 미국 법원이 자동차 급발진 사고에 대해 제조업체의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도요타를 상대로 한 400여건의 급발진 소송이 제기됐고, 도요타는 1200만 대 차량 리콜과 소송 합의금 및 벌금 등으로 총 40억달러(약 5조198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국에선 법원이 급발진을 인정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1심에서 자동차의 결함이 인정되더라도 2심이나 3심에서 뒤집히기 일쑤다. 2018년 5월 호남고속국도 인근에서 발생한 BMW 차량의 급발진 사건만이 항소심까지 승소해 대법원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제조사가 결함 입증하고 집단소송 쉬운 미국, “제조사 결함” 판결 이끌어 내
    10년 전 미국 법원이 자동차 제조사의 결함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법적 근거는 제조물 책임법(PL·Product Liability)이다. 제조물 책임법이란, 제조물의 결함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제조사가 직접 배상 책임을 지는 법을 가리킨다.
    제조물책임법은 국내에도 존재하지만, 미국과는 결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선 소비자가 제조물책임법을 근거로 제조업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요구하려면 제품의 결함을 직접 입증해야만 한다. 급발진을 증명하려면, 자신의 손해가 차량의 결함 없인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 해당 차량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던 중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더 나은 설계 방안이 있었음에도 제조사가 다른 방안을 선택해 이 같은 손해가 초래했다는 사실 등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고도의 기술력과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고, 제조사가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비자가 제품 결함을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미국에선 제조물 책임법의 입증 책임 전환(shifting the burden of proof)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차이가 있다.
    입증책임 전환이란, (소송을 건 측이 피소송자의 잘못에 대한 근거를 입증해야 하는) 소송법의 일반원칙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사건일 경우 예외적으로 소송을 건 사람이 아닌 상대방이 이를 입증하는것을 의미한다.
    즉 소(訴)를 제기하는 자가 아닌 소를 당한 자가 위법행위나 고의과실이 없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같은 미국의 제조물 책임법의 법리는 제조업체의 ‘무과실 책임’을 기초로 한 ‘엄격책임’에 뿌리를 두고 발전했다.
    엄격책임이란, 제조사가 과실 여부와 무관하게 소비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줄 책임을 뜻한다. 물품의 제조 과정에서 모든 주의의무를 다했음에도 피해가 생겼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조사가 자신들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점을 인증 받고 싶다면 제조물에 결함이 없다는 걸 직접 증명해야만 한다.
    1963년 미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그린맨(Greenman) 사건이 엄격책임과 관련한 판례를 만드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린맨이라는 사람이 목공 선반을 사용하다 나사못의 결함으로 파편에 눈을 다쳤는데,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제조사가 제조 결함에 대해 ‘엄격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42개 주에서 엄격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에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 때 입증책임을 피해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처음 논의됐다. 그러나 해당 법안을 두고 급발진 건을 관할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실상 반대 의견인 ‘신중 검토 의견’을 전달하면서 개정 가능성은 아직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피해자들의 집단소송이 용이하다는 점도 미국 내 급발진 인정 사례를 늘리는 데 큰 몫을 했다. 연방민사소송법 23조에 근거한 미국의 집단소송은 ‘남용’ 우려가 나올 정도로 활발하게 이뤄져왔다. 이 조항에 따르면, 집단에 공통된 법적 문제나 사실이 있을 경우 해당 집단 내 한명 이상의 구성원이 모든 구성원들을 대신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미국 내 집단소송은 1960년대 이후엔 소비자 보호 등 공익 소송 분야에서 많이 활용됐으며, 1980년대엔 고엽제 피해 등 불법 행위에 대한 소송 방안으로 널리 쓰였다. 2005년 증권 분야에 한해서 집단소송 제도가 도입됐으나 과도한 규제 때문에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2012년 도요타 사건 당시에도 수백만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했으며, 이듬해인 2013년에는 포드 자동차 급발진 사고와 관련해 차량 소유주 20명의 집단소송이 이뤄졌다. 국내 기업인 현대차와 기아도 작년 2월 차량 화재 발생 가능성 때문에 미국에서 집단소송을 당했다. 결과는 천문학적 금액의 과징금이었다.
    ◇한국, 형사 사건에서만 급발진 인정 돼
    국내에서도 급발진은 여러 차례 이슈가 됐었지만, 미국과 같은 법정 승리를 거둔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제조물 책임법이란 게 존재하지 않던 2000년대 이전까지는 물론, “제조업체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사람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명시한 제조물 책임법이 2002년 7월1일부터 시행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1999년 대우자동차 운전자 42명이 급발진을 이유로 회사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는데, 2002년 1심 재판부에서는 차량 변속기에 시프트록(Shift Lock·브레이크 페달을 밟아야만 변속레버를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 장착돼 있지 않아 차량에 결함이 있다고 한 운전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결국 2·3심에서 뒤집혔다.
    당시 대법원은 “급발진 사고를 대비한 안전장치가 없다고 해서 그 자동차가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안전성을 결여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자동차공학상 운전자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 급발진이 일어나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국내 제조물 책임법에 따라 운전자 본인의 과실이 없었다는 사실과 차량 결함을 소비자가 직접 입증해야만 했는데, 대법원은 이 점이 제대로 입증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대법원 판결은 지금도 여전히 민사 사건의 중요 판례로 인용되고 있다.
    급발진 사건에서 제조사가 유리한 판결을 받는 경향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민사가 아닌 형사 사건에서는 재판부가 차량 급발진 가능성을 인정해 인사사고를 낸 운전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례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추세다.
    지난 2005년 11월, 대리운전기사 박모씨가 벤츠 챠량을 몰다 서울 마포구 한 골목길에서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해 10중 추돌사고를 낸 적이 있다. 이 사고로 1명이 숨졌으며 5명은 부상을 입었다. 박씨는 “가속페달을 약하게 밟는 순간 차량이 갑자기 급발진했다”고 주장했다.
    이 형사 사건은 박씨의 무죄로 결론 났다. 2008년 대법원은 ▲사고 당시 도로 상황 ▲차량의 속도와 질주하는 힘 ▲목격자들의 진술 ▲CCTV 화면 ▲사고 후 차량 파손 부위 ▲운전자가 차량 움직인 이유 ▲운전 경력, 정신적 신체적 제반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고 판시했다. 차량 결함이 더 큰 원인이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하종선 법무법인 나루 변호사는 “형사 사건에서 급발진을 인정한 최초의 사례이자, 급발진을 인정할 기준을 처음 제시한 판결”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형사 사건과 민사 사건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이 같은 판결이 나왔을 뿐, 차량 급발진의 입증 소재가 소비자에게 있는 한 제조사 책임을 묻는 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만약 소비자가 제조사 결함을 입증한다 할지라도 제조업자가 당시의 과학·기술수준으로는 결함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을 입증할 경우, 제조사는 손해배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박재현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형사 사건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입각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과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유죄가 인정되기 때문에, 박씨가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고가 발생했을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무죄 판결이 나왔으나,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것과 급발진 책임이 차량 제조사에 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최근엔 지난 20일 대전지방법원이 대학교 캠퍼스에서 운전하다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로 경비원을 치어 숨지게 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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